한국일보

나라 만들기

2006-11-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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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예비역 준장)

몇해 전, 미국에서 의사를 하는 처남 김충환의 딸이 한국에 왔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공부 잘하는 그 조카는 교환학생으로 잠시 모국의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온 것이다. 1등 국가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 그에게 미국에서 ‘한국인의 위치’에 대해 물었다. 합중국의 수많은 인종 가운데 한국인의 위상이 날로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은 모두 흐뭇해 했다.

‘미국 곳곳에서 줄을 이은 한인 정치인들의 당선 소식은 2006년 중간선거를 시작으로 크게 달라질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을 예고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그 때 일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한인 정치인을 바라보는 미국 주류사회의 눈에 ‘편견’ 대신 ‘인정(認定)’이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 한국인의 탁월한 업무수행 능력과 깨끗하고 근검한 정치활동이 미국사회 곳곳에 신뢰를 심으며 한인들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있다는 현실에 어깨가 절로 으쓱해 진다.


60년대 초, 나는 육사 13기 동기생 김혁주 중위와 함께 군사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도미유학을 갔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장교 가운데 남미 베네수엘라의 초급장교 두 사람이 제각기 커다란 포드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걸 보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몹시 심통이 나기도 했다. 내 평생 자가용 승용차를 탈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하면서...
35년간의 일제 식민 침탈과 6.25전쟁의 참화에서 갓 벗어난 한국, 그 때 우리네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미국땅에 간 한국군 장교는 몹시 가난했고 그 모습은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국민소득 100달러도 되지 않았으니 오죽 했겠는가. 한국군은 자체 복제 령에 의한 군복도 없어 미군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가난과 굶주림을 딛고 피와 땀과 열성으로 우리는 일어섰다. 한국보다 몇 갑절 잘 살던 자원 부국 중남미는 이제 견줄 상대가 아니다. 우리보다 형편이 훨씬 나았던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사람들은 불법체류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땅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다.다이어트 하느라 법석을 떠는 오늘, ‘잉여농산물’이라는 미국의 구호 양곡으로 연명하던 그 시절을 잊어서야 쓰겠는가. 그 때 기지촌을 돌며 먹거리를 구하던 우리 아이들과 오늘날 연변 장마당을 헤매는 꽃제비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사람은 태어날 때 모국을 선택할 자유는 없다. 그러나 ‘제 모국을 어떤 나라로 만드느냐’는 구성원 각자의 하기 나름이다. 지구상 200여개 나라마다 생활양식이 다르고 사는 형편이 천차만별이다. 하루 1달러로 연명하는 빈국이 있는가 하면, 수천 달러를 써가며 해외여행을 즐기는 부국도 있다. 한 나라가 갖는 힘, 부강한 국력은 국민의 생활을 편하고 윤택하게 할 뿐 아니라 어디를 가나 사람 대접을 받게 한다. 국가는 국민의 백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조국은 바로 나의 대명사요,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갈 멍에이기도 하다.

좁은 땅에 자원은 없고, 세계에서 인구밀도 세번째의 나라, 그래서 북적대고 경쟁이 심하고 집단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그렇다고 오늘날 영토를 넓힐 방법은 없다. 고구려 때 우리 땅이었다고 만주로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출산이 국가적 문제로 대두된 마당에 인구를 줄이는 정책을 쓸 수도 없다.우리의 자원은 사람이다. 머리 좋고 부지런하고 악착같고 신바람 나면 무엇이던 해낼 수 있는 역동적 파워를 가진 민족이다. 파당 싸움만 안하면 1등 국민이 될 수 있다. 세계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던 4,700만이 한마음 되고, 7,000만이 한 핏줄로 거듭 태어나 금수강산 이 땅을 살기좋은 부자의 나라로 만드는 일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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