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한민국의 마지막날

2006-11-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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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나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베어마운틴의 산자락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살고 있다. 그래서 매년 10월 중순이 지나면 허드슨 강변을 따라 9W 길을 드라이브해서 단풍구경을 나선다.
스토니포인트를 지나면서 한층 가파라지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멀리 아래로 허드슨 강변과 산비탈의 낙엽들이 이루고 있는 절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신의 존재에 대해 긴가민가 하다가도 ‘헨델’의 ‘메시아’를 감상할 때와 ‘베어마운틴의 낙엽’을 구경할 때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틀림없이 신이 창조했을거라고 믿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또한 이런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단풍구경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일상으로 돌아와 늘 하듯이 TV를 켜면 조금 전의 맑고 아름답던 자연세계와는 판이한 인간세계가 펼쳐진다. 자살폭탄으로 불타는 차들과 파괴된 건물둘, 시체 앞에 통곡하는 사람들, 테러와 전쟁, 질병과 가난 등으로 온갖 인간세계의 추한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밝았던 마음은 금방 우울해져버리고 만다.


그 중에서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은 이라크 전쟁 참상과 이란,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이다.60년대 중반에 베스트셀러의 하나였던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쓴 김형석 교수는 하루는 철학 강의시간에 들어와 “나는 지난 3개월 동안 신문과 TV를 보지 않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세상사와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현상과 학생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이상(理想) 사이의 괴리에서 무척 고뇌하고 있던 흔적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작가 이문열은 이런 것을 ‘시대와의 불화’라고 했던가?

혹자들은 이제 이민왔으니 한국이야 밥을 짓던 죽을 쑤던 잊어버리라고 하지만 아직도 친척이나 많은 친지들이 살고 있다는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차치하고라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한 하루에도 수십번 반복되어 나오는 뉴스를 마치 이름조차 생소한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일처럼 무관심해 버릴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반신반의 해왔던 북한의 핵실험 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불안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한국내에서는 평온하기만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퍽 의아스러워 하지만 그것은 한국이 어느 정도 공산화, 즉 반미 친북화 되었는지를 이해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의 홍수피해 때, 북한에 원조를 보내라고 데모하는 단체를 보고서는 ‘시민단체들’이라고 표현하고 북한의 핵실험 후 반북 데모를 하는 시민단체는 ‘보수집단’이라고 표현하는 사회가 지금의 한국 사회상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친북은 보편화되었고 반북은 일부만 남았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친북은 커지고 친미는 줄어들고 있는 것 또한 아침이면 동쪽에서 해가 솟는 사실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북한은 사실상 공산주의도 아닌 세계 정치사상 유례가 없는 선군(先軍)정치를 하는 유일한 일인 독재정치 집단이다. 선군정치란 군을 공산주의 국가의 최고 정치협의기구인 공산당의 위에 올려놓는, 협의가 아니라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이 국가를 통치하고 공산당은 그 밑에 보조역할만 하는, 위 아래가 전도된 일인 독재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 특히 식자라 하는 층에서 북한의 경제사정이 워낙 열악해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은 것 또한 한국인들의 안보불감증에 상당부분 기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북한이 적화통일을 시도해도 6.25전쟁과 같은 20세기의 재래식 전쟁(Conventional War)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한국이 보내준 돈과 물자로도 남을지 모른다. 동시다발적인 폭동이나 게릴라전을 펼칠 것이 더 지배적이기 때문이다.나는 어느 날, 한국인들이 거리에 웅성대는 소리에 새벽잠을 깨고 나가보니 인민기와 태극기를 양손에 든 수많은 군중들이 통일거리를 만세를 외치며 가득 메우고 행진하고 중간중간에 군인인지 민간인지 모를 사람들이 트럭 위에 총을 치켜들고 ‘조국통일’을 외치는 날이 ‘대한민국의 마지막 날’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혼자만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이제 민간인들이 총대를 잡아도 ‘광주의 5.18’을 상기하며 그것을 제지할 군사령관이 없다는 사실과 전국 주요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데모인지, 내란인지 분간 못할 혼미한 상황 하에서는 미국도 개입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개운치 않은 생각이 좀처럼 떠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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