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행(山行)

2006-11-0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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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가을이 익었다. 가을이라는 그 몇일 사이에 슬프게 화려한 단풍잎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산야가 온통 아름다운 딴 세상이다. 봄 여름도 청춘의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나이 들어 단풍이 되는 가을은 더욱 아름답다.

인생은 가슴앓이 아니었던가! 겨울, 그리고 봄 여름 가슴앓이로 푸른 산 하나가 속가슴을 풀어내 보이면서 통째로 타는데, 거기에다 찬 기운을 슬그머니 감춘 가을 바람까지 살결을 스치고 지나가니 마음 약한 어떤 사람은 가을 병이란 메랑콜리한 감성에 젖어 점심밥도 굶어가면서 머
리를 떨구고 길을 가고, 어떤 사람은 수확이 끝난 철이라고 햅쌀에다 온갖 새로 거두어드린 나물이며 과일을 한 보따리 싸들고 거기에다 돼지 삼겹살까지 보태서는 히죽히죽 웃으며 집으로 간다.


가을의 풍경은 살짝 서글프고 활짝 신이 난다. 길을 가는 사람이나 산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입은 빨간 상의나 노란 점퍼, 심지어는 파아란 색깔의 화려한 색상의 옷들도 멀리서 보니 모두 단풍잎이 굴러가는 듯 하다. 산에서는 더욱 그렇다. 떨어져 쌓이는 낙엽이나, 쌓였다 흩날리는
낙엽처럼 낙엽과 더불어 산에서 흩날리며 하나가 되는 사람들, 사람이 낙엽이고 낙엽이 사람이다.

멀리 보는 낙엽의 색깔은 하나 같으나 가까이 보면 노인들의 얼굴처럼 모두 다르다. 곱게 늙은 노인, 어둡게 늙은 노인, 쓸만큼 있는 노인, 아무 것도 없이 얹혀 사는 노인, 수신하여 단정한 노인, 숨에 절어 거칠어진 노인, 행복한 노인, 불행한 노인...
산행(山行)은 산(生)사람의 행보(行步)다. 흔하게 말하기를 등산이라는 쉬운 말로 산행을 말하지만 등산과 산행은 내용이 다르다. 등산에는 등산길이 있으나 산행에는 길이 없다. 길이 될만한 곳을 찾아서 그 곳을 길 삼아 산을 올라가야 한다. 다행히도 쉬운 산행에는 군데군데 알아보기
쉽게 표시를 해 놓아 그 곳을 따라 가면 되지만, 쉽지 않은 산행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사람이 사는데 부모가 가르치는 최저의 표시를 빼놓고는 처음부터 어디 길이 있었고 인생 사는 길에 무슨 표시가 있었던가! 세상에 왔으니 쉽던 어렵던 삶을 꾸리면서 길 없는 인생의 길을 찾아 길을 내며 살아가는 것이 산행과 같지 않았던가!
산행에는 부부처럼 곰삭은 동행이 있으면 더욱 좋다. 경쟁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직장의 동료라든가, 생명이 다할 때까지 따스한 마음이 변할 수 없는 고등학교 동창이라든가, 입구에 떨어져 있는 한 줌의 쓰레기라도 유심하게 치워주는 이웃이라든가... 그런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길도 없는 산 속을 한차례 휘저으며 한바퀴 돌아 나오면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살아본 느낌이다.

평지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언덕도 있고, 물 젖은 흙길도 발 짚어 걸어야 할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돌들을 밟거나 험한 바위도 기어서 올라야 하니 산행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런 행보가 인생살이와 다를 바 없다.
힘들여 올라가는 길이 있으면 두 팔을 휘젓고 쉽게 내려가는 길도 있다. 삶의 기복이 그러하지 않았던가! 90도 가까이 내려깎인 바위 사이, 남녀 불문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난 바위 끝을 잡고 기어오른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올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지에 깔린 작은 돌을
밟기에도 휘청거린다 싶었는데 어디에서 저런 무서운 힘이 솟아나는 걸까? 이민을 와서 보니 꿈꾸던 미국이 아니라는 걸 알고나자 두 손을 갈퀴 삼아 부인들이 발휘한 힘, 아! 저런 힘이었을 것이다.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꼭 인사를 주고 받는다. 고단한 삶에서 서로 서로 위안의 말 한 종지쯤 나누는 위로의 안부가 여기저기 산길에서 뒹군다. 등을 보이면서 점점 멀리 사라지는 인파를 모두가 어디서 본듯한 사람들이다. 두 해 선배인 김시용 옹은 왜 한국에는 거대하고 정의를 위한 참담한 인간 승리의 이야기 없는가 하면서 가며가며 쉬지 않는 열변으로 행객을 감동시키고 후배인 이기덕씨는 평소에도 동창들의 바쁜 시간 틈새를 찾아다니며 동창들을 한마음으로 엮는데 힘을 기울이지만 산행에서도 노심초사하며 동창들을 보살핀다.

삶에는 어디를 가나 동료가 있고 인생에도 어디를 가나 동창이 있다. 산 위에 올라보니 여기저기 지천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들, 산은 하나이나 옆에 솟은 산이 동료가 되어 서있고, 또 그 옆에도 서 있다. 산은 무거우나 앞 뒤와 옆에 동료가 있어 가볍게 서 있고, 삶은 고달프나 앞 뒤 옆에 동창이나 친구, 그리고 동료들이 있어 힘들지 않다.
산은 서서 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해마다 산등을 스치며 지나가지만 산은 말없이 흔적만 가슴에 담는다. 그리고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그 흔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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