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웨스트 32스트릿

2006-09-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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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국의 주종수출산업이 가발제조업이었던 시절 뉴욕한인사회의 초창기 주종사업은 가발업이었다. 처음에는 가게도 없이 가발 행상을 하던 사람들이 가게를 열기 시작한 곳은 메이시 백화점 남쪽으로 뻗은 비교적 한산했던 브로드웨이였다. 이곳에 가발 이외에 의류, 가방, 모자, 주얼리, 잡화 등 도소매상이 들어서면서 인근 32가에는 식당, 술집 등 한인들의 서비스 업종이 들어섰다. 1970년 전후의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맨하탄 32가 한인타운은 31가 쪽으로, 또 35가 쪽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플러싱과 뉴저지가 한인밀집지역으로 발전하면서 한인 상대의 식당, 술집과 기타 업종이 플러싱과 뉴저지 쪽으로 옮겨갔다. 이와 함께 한인업종이 다양해지면서 브로드웨이 상가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저가품의 거래선이 한국에서 중국과 동남아로 바뀌면서 브로드웨이의 상권마저 중국인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32가 한인타운은 침체를 면치 못하게 됐다.


그러나 맨하탄 한인타운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면서 독특한 한인타운으로서 특징을 살리고 있다. 플러싱과 뉴저지의 한인타운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 곳이지만 맨하탄 32가는 학생과 전문직 종사자 등 젊은이들의 거리가 되었다. 그래서 다른 한인타운에 비해 더 생기있고 발랄한 분위기이다. 특히 주말의 밤이 되면 플러싱과 뉴저지 뿐만 아니라 멀리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지에서까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32가는 강남의 로데오 거리를 연상할 만큼 젊은이들의 물결을 이룬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한인타운은 많지만 이처럼 서울의 거리와 같은 낭만의 거리는 없다. 32가는 뉴욕의 ‘명동’인 셈이다.

요즘 한류바람을 타고 외국인들이 한인타운을 찾아 한국음식을 즐기고 한국문화를 체험하는 일이 많다. 한인타운은 그 자체가 한국문화이므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뉴욕에는 플러싱과 뉴저지의 한인타운이 크지만 지리적으로 볼 때 뉴욕의 중심지이고 젊은이들이 몰리는 맨하탄 한인타운이 외국인들에게 한류의 중심지로 알려지고 있다.
이 한인타운을 배경으로 제작되고 있는 영화 ‘웨스트 32스트릿’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영화 내용이 32가 인근에서 발생한 한인의 피살사건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갱단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32가 일대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한인들은 이 영화가 상영될 경우 이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 한인타운의 비즈니스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면서 극력 반대운동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이런 스토리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32가에 갱단의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는지
를 좀 이해하기가 어렵다. 맨하탄 32가는 대표적인 한인타운이며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므로 영화의 무대로 삼기에는 좋은 소재이다. 그러나 차이나타운이라면 갱단과 잘 어울리는 곳이지만 32가는 도무지 갱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32가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젊은이의 로맨스나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는 스토리 등이 얽힌 내용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32가 상인들은 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기업이 한국 CJ그룹의 CJ 엔터테인먼트라고 말하면서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CJ그룹은 제일제당이 새로 바꾼 이름이며 이 그룹의 뿌리는 한국 최대의 삼성재벌이다. 상인들의 주장대로 이런 대기업이 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리기 위해 32가에 있지도 않은 갱단 스토리로 영화를 만들어 한인타운에 피해를 준다면 이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한인타운이 갱단의 소굴처럼 묘사된다면 32가 한인타운의 이미지는 크게 떨어진다. 32가는 낮보다 밤의 거리이다. 이런 곳에 갱단의 범죄 위험이 있는 것으로 오해된다면 밤에 발길이 끊기게 될 것이다. 한인타운이 죽게 된다는 말이다. 어디 그 뿐인가. 외국인들에게 한인 전체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다. 매춘 등 부정적 이미지로 타격을 입고 있는 한인들에게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된다.

영화를 만들 때는 흥행을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재미있는 스토리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드라마는 대부분 사실에 꾸민 이야기를 붙여서 흥미있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꾸민 이야기로 인해 피해를 받게되는 당사자는 영화 제작을 막고 또 제작되더라도 상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한다. ‘다빈치 코드’ 등 반기독교적 영화가 상영될 때 기독교계가 강력히 반대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 ‘웨스트 32스트릿’이 한인들의 이미지를 떨어뜨리고 한인사회를 해치는 내용이라면 이는 32가 상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모든 한인과 한인단체들이 들고 일어서야 할 일이다.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귀추가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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