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혼돈의 ‘정체성’ 용어 사용

2006-09-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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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로(베이사이드)

반만년에 이르는 한국의 역사를 가깝게는 전·노정권의 정체성, 제5공화국 시절, 구한말과 일제 치하로 구분할라치면 정체성의 시시비비 대상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좌파적 진보를 위한 정체성 논란을 문제삼을 것은 더욱 많은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없는지? 있다면 어떤 부문인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명히 각 개인마다 정체성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하튼 정치계에서는 그럴만한 명분 하에 타당성을 가지고 정체성의 용어 사용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그래서 역사란 인물과 환경의 만남의 기록이라 했나 보다.

요즘엔 또 종교계에서도 정체성의 용어 사용이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 물론 종교계라 해서 시대적 변화에 요구될 사항이 없으란 법은 없을 것이다.나의 좁은 소견으로는 과거 진공관 시대에서 오늘의 디지털, 아이티 나노 기술시대에 접해 출생한 신시대에 적응토록 교계도 유지 발전과 관리운영상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본다. 변천을 위한 걸맞는 교육과 인도 방법 등에 대한 변화의 유도적 수단으로서의 정체성 용어 사용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다른 어떤 정치계나 사회성과는 달리 절대불변의 정체성 사용은 진리요, 순종의 몫이요, 복종과 섬김의 최상인 절대자의 사랑과 자비 받음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은혜받아 구원을 얻어 영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진리와 순종, 섬김에 대한 특수성에는 건드릴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A가 이러하였으니 B로 변화해 보자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B가 이러하니 과거의 A대로 되어 가자는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A와 B가 미래 C에는 이렇게 요구될 것이니 A와 B를 변화시켜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인지가 분별되지 않아 혼돈을 겪는다.
여하튼 정체성이란 말은 분명 무엇인가를 바꾸어 보겠다는 의도 하에 사용되는 말인 것으로 볼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숙고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마치 우아한 꽃병에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꽂아놓았다 하더라도 한 순간은 분위기에 맞고 눈요기의 장식에 지나지 않는 법이고, 또 얼마 안있어 시들면 화병은 씻어 보관할 것이고 시들은 꽃은 쓰레기통에 버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특히 정치인의 의정활동에 있어 과시적 효과만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의제할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시들어버리게 될 지도 모를 것 가지고 입씨름 하지 말고 버려질 수 없는 꽃 가지고 보다 심중하고도 검증된 질 높은 것만을 가지고 논쟁할 일이다. 그야말로 인물과 환경의 만남에 기록될 수 있을 것에 힘쓰고 고민하며 열과 성을 다해야 할 일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를 위해 그 대상이 지금은 향기 나고 아름답다면 그것은 더 큰 역효과를 내기 위한 정체성 운운일 것이며 어찌 보면 ‘구시화문(口是禍門)이 될 수도 있다고 볼 때 정체성이란 말을 쉽게 사용할 일은 아닐성 싶다.
소크라테스는 “과거에 대해 고찰되지 않은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말에는 “지금 우리는 과거를 사는 것도,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다. 현재만이 유일한 관심꺼리다”라고, 또 “가장 훌륭한 정치는 정치적 술수가 없는 정치”라고 했다.

분명하게 말해 현재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에게 옳지 못한 시대성 만남에 발 맞추어 옳지 못한 사고의 전염으로 변화를 만들려는 노력보다는 향후 얼마 안있어 되돌아올 업보에 정체성의 심판 받음이 염려가 없을런지 먼저 감지하여 지혜있게 행동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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