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용의 미학

2006-08-2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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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민(퀸즈 차일드 가이던스센터 아시안 클리닉 정신상담 소셜워커)

클리닉에서 부부문제나 가족 갈등으로 인해 내담하는 클라이언트들을 상담하다 보면 그 원인이 가정 내의 대화 단절인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잘못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대화가 단절되는 것이다. 잘못된 대화는 상대방과의 대화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서로의 관계를 서서히 파괴하는 주범이다. 불행히 우리가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의 대부분은 잘못된 대화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대화는 대화 상대자의 감정을 받아주지 않고 거부하는 일련의 대화 유형을 일컫는다.

상대방이 말한 내용에 대해서 섣부르게 방어하거나 변명하든지, 충고나 해석을 하려들거나 오히려 공격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예를 들어, 어느날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온 아내가 저녁 늦은 시간에 가족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했다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여기저기 돌리고 있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당신 좀 너무한거 아냐?” “나 요즘 많이 피곤해” “직장일로도 스트레스 받는데다가 집에 돌아오면 또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다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야”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당신을 못 도와주는 이유는 나도 힘들기 때문이야” “요즘 내가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당신도 알잖아?” 상대방의 감정을 거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상대가 기분을 표현할 때 자신을 방어하거나 변명하는 것이다. 이 대화에서 남편은 아내의 감정을 수용
하지 않고 자신이 더 힘들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아내를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있다.


또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일을 좀 줄이지 그래” “일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집안일을 하는게 힘들지” 상대방의 감정을 거부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섣불리 대화내용을 분석하고 조언을 하는 경우이다. 이 대화에서 남편은 아내가 힘들다는 점을 수용하기 보다는 힘든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그 원인을 일을 많이 하는 아내에게 돌리고 있다.가장 좋지 않은 대화 유형은 상대방의 감정을 수용하기는 커녕 오히려 공격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자신의 책임을 피해가면서 상대방의 잘못만을 얘기하는 것은 교묘하면서도 파괴적인 대화 유형이다. 이 결과 부부 사이에 한동안 뜨거운 공방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위의 예에서 남편이 할 수 있는 바람직한 대화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수용의 대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요즘 당신 직장일과 집안일로 힘들구나?” 더 나아가 “당신, 직장일로 스트레스 받고 와서 집안일까지 다 해야하니 힘들다는 이야기구나” “더군다나 내가 하나 도와주지도 않고 힘든 걸 알아주지도 않으니까 서운할 수도 있겠구나”첫번째 대화는 반영의 대화 방법이다. 아내가 여러가지 일로 힘들다는 감정을 표현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간단히 수용해 주는 방법이다. 두번째와 세번째 대화는 부연의 대화 방법이다. 남편의 입장에서 자신이 아내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아내가 잔소리 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섣불리 방어하거나 아내에게 반대로 조언을 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아내가 말한 것에 대해서 그 느낌과 감정을 먼저 이해하고 수용함으로 인해 원활한 대화를 촉진할 수 있다.

이런 반응을 통해서 아내는 자신이 힘들다는 것과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감정을 남편이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 아내도 상대방에게 서운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며 비판적이고 공격적으로 나오기보다는 남편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 특히 부부관계에서 한 마디의 거부하는 말로 인하여 감정이 상하고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고, 또 한마디의 수용의 말로 인하여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며, 나아가 원활한 부부관계의 초석을 놓을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 일상의 대화를 서로의 감정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수용의 대화’로 채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용의 대화가 가져다주는 유용성과 긍정적인 측면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 형성의 기본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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