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제는 정체성이다

2006-06-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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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뉴욕,뉴저지 유권자센터 사무총장)

우리는 왜 축구를 보면서 축구선수나 축구를 응원하기 보다는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대한민국을 응원하는가? 우리는 왜 한국의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을 때 마다 환호하고 눈시울까지 적시는가? 한인들의 투표율은 왜 한인 후보가 나와야지 높아지는가? 이것이 바로 정체성이다.터키인들은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원래 터키인들의 원류는 투르크(돌궐)였다. 돌궐은 한족과 대결하면서 항상 고구려와 형제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실제로 돌궐의 공주가 연개소문과 혼인을 하기도 하였다. 터키는 그들의 역사에서 이것을 가르쳐왔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손 코리아를 그들의 형제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역사를 망각하고 왜 그들이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중원을 주름잡던 투르크 전사의 후예임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역사적인 형제국의 정체성까지 알고 있다. 문제는 거란이다. 거란은 같은 쥬신(고조선) 계열의 민족이면서도 한(漢)화정책을 심하게 추진하여 같은 민족들을 아예 식물 취급을 하였다. 마치 한국인들이 중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오랑캐 취급하는 것과 유사하다. 거기에 거란은 북부의 몽골과 북만주 생여진의 미움을 산데다가 특산물 조공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그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송사(宋史)』에 따르면, “여진은 요나라(거란이 세운나라) 사람들에게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宋史』472). 몽골도 거란을 같은 민족이지만 “한족(漢族) 트기”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중국을 ‘거란’으로 부르고 있다. 남부에 있는 여진을 숙여진이라 하고 북부의 여진을 생여진이라고 했는데, 이 생여진 가운데 오늘날의 흑룡강(黑龍江 : 흑수) 부근에서 아골타(阿骨打)라는 영웅이 나타나 부족들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설한다(『契丹國志』9). 이 생여진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다. (『金史』60 「招聘表」 『金史』135 「高麗傳」)금나라의 태조(아골타)는 요나라(거란)를 멸망시킨 후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한다(『金史』卷1 本紀1).


그러니 결국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보다시피 ‘발해 = 고구려’이기 때문이다. 건주여진은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 : 1559~1626)라는 신라 출신의 희대(稀代)의 영걸(英傑)이 나타나서 만주 쥬신(옛조선의 후예들)의 운명이 바뀐다. 아이신자오뤄누루하치(愛新覺羅奴兒哈赤)는 한국식으로 표기하면 김누루하치가 된다.

즉, 아이신자오뤄는 경주 김씨라는 의미의 김(金)이고, 누루하치는 쥬신 고유어이므로 김 누루하치가 맞다. 건주여진(建州女眞)과 조선(朝鮮)은 바로 연접하여 있었기 때문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활발했다. 물론 정부 차원이 아니라 민간 차원의 이야기다. 건주여진은 회령(會寧) 사람들과 함께 경작하여 먹었고 조선인과 대대로 혼인하며 살았기 때문에 “조선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世宗實錄』11, 19, 77, 84).
여진의 말은 함경도 말과 유사하여 서로 대화가 될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이들이 만주족이다.

그러나 그토록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했던 만주족(여진)들도 청나라를 경영하면서 대부분 한족으로 동화되었고, 실제로 만주에는 30만 정도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옛 조선과 고구려의 후예들 중 중원을 경영했던 몽골과 일부의 만주족(여진) 그리고 한반도의 후예들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거란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하기 보다는 한족의 주위를 맴돌면서 주위의 형제들을 타박하였기 때문이다. 민족의 정체성은 그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 보다도 중요하다. 수많은 종교와 통치 이데올로기가 반만년 역사 속에서 반짝하였지만 민족은 어머니 품처럼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면서 세기를 이어왔다.

한인 정치인만이 한인 사회를 위하여 일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후대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중요한 일들 중에 한인 정치인은 대단히 중요하다. 비단 이것은 한인들만의 방식이 아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인종과 민족들이 그렇게 해왔다. 한명의 정치인이 배출될 때 마다 그 커뮤니티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약의 내면에는 한명의 정치인이 있었지만, 그 힘은 커뮤니티의 단결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한족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에 충실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거란과 같이 형제들을 분열시키고 발해를 멸망 시켰던 행위가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사회에서 일어나
서는 안될 것이다. 이유는 있겠지만 커뮤니티의 분열을 조성하는 행위는 결국 커뮤니티에 패배감을 만들어 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2006년 월드컵, 대~한민국의 함성 속에서, 다시금 한인정치 1번지 플러
싱의 선거를 맞이하는 한인사회의 단결과 발전 그 중심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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