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6.25를 상기하며

2006-06-23 (금)
크게 작게
방준재(내과전문의)

내 앞에 앉아있던 어느 노신사가 가만히 강연을 듣다가 좌석에서 일어났다. 유창한 영어로 강
연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연자가 한창 6.25전쟁 당시의 미군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있을 때였
다.
자기 소개부터 했다. 북한 인민군 출신이라 했다. 당시 인민군으로 소속되어 있을 때 제주도를
연호하며 사기 진작하는 인민군 간부들이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제주도를 연호했다는 말은
1948년 초부터 제주도에서 무르익기 시작한 소위 4.3 사건을 말한다. 그것이 1948년의 여수 순
천 반란사건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노신사의 주장은 6.25전쟁이 사전 계획된 적화 남침이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신의 과
거 경력과 경험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데 미군의 잔혹상만 늘어놓느냐는 항
의였다. 노신사는 강연자의 의도나 그가 책으로 주장하는 바를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미군의 잔혹상을 고발하던 그 강연자는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를 쓴 시카고대학의 교수였다.노신사의 차분하면서도 격정이 깔려있는 항의성 질문에 강연자는 답변성 설명을 했다.

6.25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감정적(Emotional)요소가 있는 것은 알고 있다면서 슬쩍 넘기며 자신의 본래 강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라크전쟁이 터졌을 때 구소련의 동구권 해방에 비유해서 열렬히 찬성하던 뉴욕타임스의 유명한 칼럼니스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국인이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비판적인 미국인이 많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경험하던 순간이었다. 비판하고, 헤집고, 추한 부분을 들취내야만 하는 부
류들이 많다는 얘기다.6.25라면 숫자만 보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그렇다. 뒤따라는 사변이나 동란이나, 전쟁이라는 단어가 없어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를 기해서 북한이 4개 방향으로 기습 남침했다는 것을 뜻함을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른 후 전쟁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냐는 전쟁 기원을 따지면 무엇 하느냐에서부터 민족간의 내전으로 폄하하고, 실패한 통일전쟁으로까지 ‘내재적’ 해석도 보고 있다. 수정주의라 불리다가 구소련의 비밀문서가 햇빛을 보고난 후에야 소련의 지원 하에 사전 준비된 기습전쟁,
곧 사변으로 굳혀진 것은 이제 이론(異論)이 없을 줄 믿는다.
6.25가 난지 올해로써 56년째를 맞고 있다. 올해는 용케도 전쟁이 발발했던 일요일이다. 지난 56년 동안 전쟁에 관한 많은 문학서를 탄생시켰고, 역사서도 많다. 한국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6.25사변이라듯이 전쟁의 기원이라든지, 전쟁이 끼친 한반도의 현 상황이라든지 6.25를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할 수 없는 듯 관심이 많다. 그것은 마치 남북전쟁을 이해하지 않고는 오늘의 미국을, 그리고 9.11 테러를 이해하지 않고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바깥 사람들이 미국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9.11 테
러 후의 미국의 변화를 몸소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6.25를 체험적으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해방동이로 5살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전쟁중의 기억으로는 고향 진주의 남강다리 폭파나 하늘을 덮었던 B-29의 편대와 그리고 지나간 후의 폐허가 된 고향은 기억하고 있다.피난의 대열에 서보기도 하고 먼 산중으로 피신, 굴 속에서 지내본 적도 기억한다. 적령기가 되어 가야 할 학교도 부서져 버리고 동네 아이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기관총알을 만지다 다
치는 것도 목격했다. 구호물자로 받았던 연필의 향내가 그리도 좋았고 밀가루네, DDT네 스쳐가는 단어들도 있다.

전쟁이 끝났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불리는 지난 56년간의 숱한 테러사건들, 납치사건들, 1.21 청와대 기습사건, 판문점 도끼사건 등을 보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면서도 ‘잊혀진 전쟁’은 곳곳에서 잊지 않으려 전쟁기념탑을 세우고 있다. 키세나팍에 세워질 참전용사 기념탑도 그 중의 하나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나 ‘잊혀진 전쟁’이라 불리는 6.25사변이지만 언젠가 ‘월터 크롱카이트’가 해설하던 전쟁 다큐멘타리에서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잊혀진 승리’라던 끝맺음에 동의하고 있다.
현재의 남북한의 상황을 보면 모두가 수긍하리라 믿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국으로 도약하고 광부와 간호원들과 같이 흘렸던 눈물은 지금 눈물의 바다가 아니라 당당히 ‘대~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 16강을 바라보고 있는 오늘
이다.

자유! 민주주의! 이 낱말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만방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이다.우리 다함께 불뚝 일어나서 두 주먹을 하늘로 향한 채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고 외치며 올해의 6.25를 맞아보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