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추억

2006-06-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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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1979년 여름 ‘미국 의사 모국방문 초청’으로 한국에 들렸다.
이들은 누구인가? 1960년 중반에서 1970년 후반 사이 외국 의대 졸업생 의사시험(E.C.F.M.G.)을 합격한 후에 미국으로 초청을 받아 미국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의사들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두뇌 유출이라는 이민집단의 대이동의 물결이었다.

미국에서 부족한 국내 의사들을 충원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제3국 국가의 의과대학생들에게 실시한 제도였다. 나도 졸업과 동시에 시험을 통과하고 기러기 떼와 같이 태평양을 건너 이동하는 대열에 끼어 미국으로 날아왔다.해외로 원정을 떠나는 대이동의 또다른 물줄기가 있었다. 1960년도에서 1970년도 후반에 이르기까지 독일로 파견한 간호사와 광부, 그리고 월남 파병이었다. 그들은 월남의 전쟁터에서, 독일 탄광에서 석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벌은 돈을 고국에 송금하였다. 국내 외화보유고를 늘리고
인력을 담보로 들여온 차관은 고속도로 등 한국 경제개발의 초석이 되었다. 나의 인턴, 레지던트 수련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삶의 뿌리의 이동은 수평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가죽 채찍으로 후려치는 듯한 혹독한 현실이었다.


힘겨운 수련과정을 끝낸 그 여름, 우리들은 기러기 떼처럼 철새가 되어 태평양을 건너 떠나왔던 고국으로 다시 날아갔다.
모국방문 중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단체로 들렸다. 홍보관의 책임자가 자동차 제작과정을 설명하면서 공장 내부를 안내하였다. 자동차 차체 조립의 철판을 프레스 기계를 이용해 자동차 각 부분에 필요한 입체적인 모양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여기저기서 철판을 용접하는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함께 강렬한 불꽃이 튀기었다.
자동차 관람이 끝나고 넓은 공장 식당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나는 긴 줄에 서서 칸이 나누어져 있는 쟁반에 여러가지 반찬을 담았다. 멸치볶음, 북어무침, 달걀찜, 생선구이, 오이소박이 등 근로자들을 배려한 감칠맛 나는 반찬이었다.

식사 도중 공장의 팀장인 듯한 사람이 일어서더니 인사말을 하였다. “해외에서 오신 여러분! 최초 모델인 포니에서 더욱 발전하여 국제경쟁력을 갖춘 첨단 고품격 자동차를 해외시장으로 수출하려는 열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공장은 자동차를 만들어내는 산실입니다. 그러니 해외로 돌아가신 후 모든 분들이 현대자동차를 한 대씩 사 주십시요” 카리스마 넘치고 호소력 있는 스피치였다.나는 그 때 온몸에 전율을 느끼는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식사를 하고 있던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목이 메어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식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러나 나는 현주소로 돌아와서 울산 공장에서 받았던 감동을 아득히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거리에서, 고속도로의 자동차의 물결 속에서 현대 차가 눈에 뜨이는게 아닌가? 치열한 국제 자동차 경쟁에서 살아남아 북미, 유럽, 미국 등 세계의 거리를 달린다. 미국의 거리를 달리는 현대자동차는 다시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지금 현대차는 대수술을 받고 있다. 심한 출혈로 빈사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하루빨리 치유되어 지구촌 세계 시장 곳곳을 누비며 다시 달리기를 바란다.현장의 근로자들과 함께 울었던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의 추억을 먹칠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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