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답과 정답

2006-06-1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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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우리는 ‘해답을 찾아서’라는 말이 많이 들리는 세상 가운데 서 있다. 해답과 정답도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찾아내라니 답답함이 앞서기도 한다는 소리도 곁들여 들린다.산토끼의 반대는 무엇이냐고 오래된 퀴즈 중에 하나가 있다. 가장 먼저 나오는 답이 끼토산, 집토끼라고 말한다.
한참을 있다가 아니 바다토끼도 있을 수 있지, 그러다가 판 토끼도 있고, 또 죽은 토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정답이다. 더 나아가 알카리 토끼라는 답도 있다.

우리가 접하는 문제는 그것이 아무리 단순한 것이라고 해도 답이 하나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한 가지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양한 답이 모두 정답일 수 있는 시대에 산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내 입장에서만 답을 내세우기 보다는
생각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말이 있다.
생각의 다양성을 가로 막는 것이 바로 획일성이다. ‘획일성’이란 간단히 말해서 ‘차이의 불인정‘으로 나와 조금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려 하고, 조금만 신체적 장애가 있어도 같은 그룹에 끼워주지 않으며, 정답은 하나 이상이 될 수 없는 객관식
시험 등등, 우리들 모두는 이러한 ‘차이의 불인정’에 길들어져 있다. 정작 중요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고 생각하는 경험을 하지 않는다.


어떤 원리가 있는지 이해하지 않고, 어떤 원리를 적용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공식만을 외운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많이 외우고, 더 많은 공식의 적용 방법만을 생각해야 한다.
내가 스스로나의 생각을 갖다 보면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게임에서 뒤쳐져 보인다. 그래서 너무 공식만을 찾는다. 정답을 누가 갖다 주기만을 바란다. 결국 생각이 단순해지고 한번 해결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생각 속에 꿈, 비전, 소원, 상상력, 가치관, 세계관, 그리고 태도가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관심은 생각의 변화에 두어야 한다.

해답이란 언제나 풀어나가는 사람에 따라서 다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답은 나온다. 문제의 출제는 똑같지만 모든 문제의 해답은 자신의 삶으로 인해 만들어지고 변해간다. 어떤 이들은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답은 풀어서 밝히거나 답하는 것이고 정답은 옳은 답을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서도 각종 비결
을 배우는데 애를 쓴다. 하드웨어 시대에는 ‘어떻게’(노 하우, know how)가 중요한 기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소프트웨어 시대에는’왜’(노 와이, know why)가 상대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남이 창작한 것을 자기한테 걸맞게 개조하기 위해선 ‘왜’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낼 수 있다.

눈만 뜨고 열심히 보면 언젠가는 보일 테니까. 그러나 ‘왜’는 머릿속 깊이 감춰져 있기 때문에 눈을 감고 봐야 한다. 곧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인생이 소위 성공한 인생일까? 세상적인 잣대로는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기준은 흔들리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도 상황 따라 변한다. 행복한 인생을 꿈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지만 실제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누리지 못한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남아 있다. 이제 해답은 예수를 믿는 길이고 정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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