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육영수 여사의 죽음

2006-06-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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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일(취재1부 부장)

“오늘 아침 10시25분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절 대국민 연설도중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 일반인들, 정부 관리들과 외교관들로 구성된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이 거의 끝날 무렵 한 남성이 일어나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드레스에 피가 묻은 미세스 박(육영수 여사)은 무대에서 들려 나갔다. 그녀가 총상을 입었는지 아니면 기절을 하면서 머리에 부상을 입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정부의 한 장관은 그녀가 단순히 기절했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그녀가 총격을 받았을 가능성을 확인 중이다. 우리는 그녀가 병원에 입원했지만 무사하다고 전해 들었다. 암살을 시도한 남성은 붙잡혀 극장에서 들려나갔다. 안정이 되찾아 지자 대통령은 자신의 연설을 마쳤고 기립 박수를 받으며 극장을 떠났다.”

1974년 8월15일 새벽 2시51분(워싱턴D.C. 시간) 당시 주한 미대사 필립 하비브가 국무부 본부에 보고한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첫 전보 내용이다.
미 정부가 최근 비밀 해제한 국무부 기록에 따르면 하비브 대사의 보고는 범행을 저지른 재일동포 문세광이 한국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박 대통령이 1975년 1월1일 신년사에서 8.15 암살 기도가 북한의 야만스러운 배후조정으로 이뤄진 점을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까지 상세하게 이어진다.


보고에는 한국 당국의 수사 결과 문세광이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약 1년 전인 1973년 8월8일 일본에서 한국으로 납치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에 앞장선 재일동포 단체의 유급 사무총장이었던 경력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 그가 일본에서 북한 간첩과 조총련의 지령을 받고 박 대통령 암살을 계획했으며 일본인 여성의 도움을 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그 여성 남편 명의의 일본여권과 일본 경찰서에서 훔친 권총을 갖고 한국에 입국, 암살 계획을 실행에 옮긴 사실도포함돼 있다. 하비브 대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일본내 공범 수사 요청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고 ‘도의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책임이 없다’는 일본의 입장에 강한 불만을 품은 박 대통령이 조총련의 활동을 방관하는 일본과의 외교관계 단절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국무부 본부에 통보했다.

이외에도 박 대통령이 북한의 배후조정을 받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국내외 세력을 미국이 인권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사사건건 보호하고 있다고 판단,국가안보와 정권을 위해 주한미군철수 및 자체 핵 무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이라는 장기적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도 국무부에 본부에 전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하비브 대사의 보고대로 박 대통령의 계획이 이뤄졌더라면 주한미군철수를 부르짖으며 핵 무기 위협을 내세워 적화통일을 꿈꾸는 북한은 과연 존속할 수 있었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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