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직도 봉합되지 않은 상처

2006-05-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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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이른 아침이면 가파른 언덕길을 숨 가쁘게 걸어 올라오는 히스패닉 계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사는 곳은 히스패닉이 밀집해 사는 빈민가이다. 그들은 집을 떠나 지하철을 타고 맨하탄에 도착하여 (Ferry boat) 배를 타고 스태튼 아일랜드 섬으로 건너와 다시 버스를 갈아 탄 후 언덕길을 걸어 올라오는 것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아침, 저녁으로 허드슨 강 하류 뉴욕항의 리버티섬에 횃불을 높이 쳐들고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의 둥지와 그들의 일터인 교외 외곽지대의 백인지역을 연결하는 길은 멀고도 멀다. 백인 집에서 가사와 청소, 아이를 돌보고 저녁이면 다시 걸어 올라왔던 같은 언덕길을 내려간다.

우리 짚 앞뜰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꼬리를 젓고 헤엄쳐 다니는 금붕어를 구경한다. 유모차에 금발에 파란 눈의 백인 아기를 태우고 연못가에 모여드는 히스패닉 여인들도 만나게 된다. 아침에 일터를 향해 언덕을 숨 가쁘게 걸어 올라온 여자들이다. 나는 생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반짝이는 모조 보석이 박힌 머리핀을 꽂은 이 여인들의 신분도, 이름도, 누구의 집에서 일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여인들은 멕시코에서 가마솥 같이 태양이 이글거리는 사막을 걸어 왔거나 돌고래처럼 강을 헤엄쳐 목숨을 걸고 국경지대를 넘어왔으리라.
그들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그들보다 더 머나먼 곳인 지구 반대편에서 기러기처럼 날아온 낯선 이방인이 아닌가.
동네 주위를 운전하다 보면 골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잔디를 깎는 사람들은 짙은 갈색 피부에 키가 작은 라틴계 남자들이다. 저임금으로 그늘에서 두더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지하경제의 구성원들이다. 융단 같은 잔디 위에서 맑은 산소를 마시며 하얀 골프공을 날리는 사람들은 키가 큰 백인들이다.


라티노 아메리카와 앵글로 아메리카의 선은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또한 그늘과 양지도 함께 공존한다. 그들은 대 농장이나 건설업 서비스업 뿐 아니라 우리 집 앞마당의 잡초와 같이 어디서나 아무데서나 가까운 곳에서 만나게 된다. 짓밟아도 다시 자라나는 질긴 생명력의 잡초와 같은 이민자들이다. 그들과 나는 같은 삶의 공간에서 부딪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운명체인 이웃이다. 5월 15일 오후 8시에 부시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이민법에 관한 대국민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이민개혁법안 핵심 쟁점은 실타래와 같이 엉켜 있어 명쾌한 해답이 없는 것 같다.

1848년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의 서남부의 광활한 영토를 넘겨받았다. 앵글로 아메리카와 라티노 아메리카의 국경을 가르는 리오그란데 강은 오랜 국경 분쟁의 애환을 담고 유유히 세월과 함께 흐른다. 개정 이민법은 멕시코의 구경지대의 경비를 더욱 강화하여 침입자들을 봉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멕시코 인들은 어제도, 오늘도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몰려오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의 영토 전쟁의 상처로 남긴 국경지대는 찢어진 채 아직도 봉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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