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님의 사랑

2006-05-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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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뉴저지 리버에지)

해마다 ‘어머니 날’을 맞이하지만 이번은 더욱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던 생각이 문득 난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있겠나마는 내 어머니의 나에 대한 사랑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우리의 좋은 땅을 소작인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나쁜 땅만을 주면서도 그것을 자작 경작하지 않으면 빼앗겠다고 하니 농사일을 손수 해보지 못한 부모님은 직접 논밭에 나가 힘든 일을 하게되니 어머니는 힘들어 하면서도 밤마다 뚫어진 양말을 꿰매면서 조는 모습을 가끔 뵐 수 있었다.

춘궁기에는 쌀이 모자라 수제비, 옥수수, 감자로 저녁을 떼우면서도 내가 먼 30리길을 통학하는 것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하숙할 것을 권했지만 당시 하숙하려면 학교에서 주던 쌀 배급표에다 쌀 3말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거절했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매일 새벽 잠도 푹 주무시지
못하고 당시 시골에는 지금처럼 개스불이나 연탄불도 없고 장작도 없어 가끔 젖은 짚단으로 불을 피워 밥을 지어 도시락은 쌀밥으로 2개 싸서 주었고 밤 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랫목의 이불 속에 덮어놓았던 더운 밥을 주곤 했다.


이렇게 어머니는 한번도 나에게 식은밥을 먹게 하지 않아 내가 우리 학교 학생들 중에서 제일 먼곳에서 도보로 통학하는 학생이었기에 지금도 그 덕분에 걷는데는 자신이 있다.6.25가 발생하자 학생들을 강제로 군대에 동원시켰는데 나는 재빨리 피신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점점 격화하자 관할 내무서(경찰서와 같음)에서 숨어있는 나를 찾아내라며 내 어머니를 연행해 갔다. 끝끝내 어머니는 나의 소재를 모른다고 부인했다.그 당시 학생 동원은 담임선생 책임이어서 담임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자수하면 어머니를 석방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나는 자수하여 어머니를 석방시켰다.

어머니는 끌려가는 나에게 불합격으로 돌아오게끔 독풀인 자라초(논두렁에 노랗게 피었다가 푸른 오디처럼 맺히는 풀)의 즙을 내 오른쪽 넙적다리에 붙여주어 다음날 새벽, 평양 숭실학교 강당(당시 동원집결소)에 가서 감았던 붕대를 풀어보니 피부가 헐고 큰 상처가 생겨있었다. 나는
다시 마루바닥에 깔려있는 연탄가루를 그 상처에 문질렀다. 그랬더니 상당히 큰 상처가 생겼다(지금도 그 상처의 흔적이 있음).

이것으로 전방 배치를 늦추고 있었는데 1주일 후에 이웃 군(郡)에서 온 젊은이가 독초의 즙을 잔등에 문지르고 와 상처가 온 잔등에 생겨나 인위로 만든 상처가 발각됐다. 이렇게 일부러 상처를 만든 젊은이는 전방으로 보내지 않고 강제노동장인 광산으로 보내기로 해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침밥을 먹고 평북 운산광산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공습경보로 지하에 피신하고 있을 때 내 1년 후배가 불합격 증명으로 집에 가게 됐다며 보이는데 다른 곳에서 온 젊은이도 불합격 증명을 보이는데 증명서 한장에 이름이 2명 써있는 것을 보고 재빨리 1명만 되어있는 친구의 증명서에 내 이름을 쓰고 공습경보가 해제되자마자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보초소를 빠져나와 도망칠 수 있었다.

도피해서 집에는 있지 못하고 누님집에서 밤에는 산에서, 낮에는 콩밭 속의 땅굴속에서 지내다가 유엔군의 북진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것도 몇개월 후인 12월 5일 유엔군의 후퇴로 부모님은 나에게 “대동강 건너가 있다가 돌아오라”하시며 혹시나 해서 어머니는 고히 간직했던 명주 2필을 내 베낭에 넣어주어 그것으로 쌀을 바꿔 먹으며 2주에 걸쳐 서울까지 무사히 왔고, 지금은 미국까지 와서 자유롭게 살게 된 것은 무한한 부모의 사랑이었기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산소라도 찾아가서 성묘하며 불효자식의 죄를 용서 받으려고 2002년 성묘단의 모집으로 52년만
에 북녘땅을 밟았다. 그러나 당시 폭우라는 이유로 성묘를 성사시켜주지 않아 그대로 돌아왔으니 지금도 그 한은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어찌 ‘민족공조’하면서도 그토록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를 묵살할 수 있었느냐고 생각하며 원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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