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자의 눈/ 잊어서는 안될 4.29 LA폭동

2006-04-28 (금)
크게 작게
이진수(취재1부 기자)

4.29 LA 폭동이 14주기를 맞았다.
LA 폭동은 지난 91년 3월3일 LA 경찰청 소속 백인경찰관 4명이 흑인 운전사 로드니 킹을 집단구타하면서 발단이 된 사건으로 이듬해인 92년 4월29일 법원이 이들 폭력경찰을 무죄판결하면서 불거진 백인과 흑인간의 인종분쟁이다.
법원판결이 난 4월29일 오후 3시, 분노한 흑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시작했고 해질 무렵부터 폭도로 변해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걷잡을 수 없는 폭력사태로 비화됐다. LA폭동은 이처럼 인종차별을 자행하고 이를 묵인한 백인들에 대한 흑인들의 극단적 분노의 집단적 표출이었다.
하지만 하룻밤사이 이 흑백간 인종분쟁의 피해자는 다름 아닌 한인이 돼 버렸다.

당시 폭동이 일어난 지역에서 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한인들은 이 폭동이 한흑간 갈등에서 비롯된 인종분쟁이라는 미 언론과 방송의 어처구니없는 호도로 최대의 피해자가 됐다. 미 언론들은 이미 무죄로 종결된 ‘두순자 여인 사건’을 악용, “한인상인이 흑인소녀를 피살했었다”는 내용을 연일 보도하기 시작, 폭도들의 시선을 한인사회로 돌리게 했다. 결국 이 지
역 대부분의 한인 상점들은 폐허가 됐다. 불타고 있는 상점 앞에서 울부짖고 있는 상인들이 대부분 한인이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특히 당시 LA경찰은 폭동에 대한 진압 보다 폭동의 백인지역으로의 확산을 막는대만 주력해 큰 비난을 받았다. 방위군 투입도 예정시간보다 24시간이 늦어진 5월1일 시행, 피해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4일간 자행된 LA 폭동으로 한인사회는 약 4억 달러의 재산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으나 이보다 더 큰 피해는 정치력 부재에 대한 절망감이었다.


LA 폭동이후 한인들은 평화집회를 열어 인종화합을 촉구하는 한편 경찰과 정부의 부당한 대처를 지적했다. 하지만 ‘피해자’라는 것 이상의 그 어떤 억울함도 해결 받지 못했다. 다만 LA 폭동을 통해 한인사회는 비로소 정치력 신장과 리더십 개발, 소수민족 연대에 대한 각성이 일기 시작했다. LA 폭동을 계기로 수많은 한인권익옹호단체들이 줄이어 출범했다. LA 폭동이 일어난지 1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미국내 빈익빈 부익부 경제 양극화는 좁혀질 줄 모르고 있다. 때문에 제 2의 폭동에 대한 우려가 일고 있다.

멕콘 보고서는 “흑백간의 빈부차가 극복되지 않으면 또 이 같은 사건이 재현될 것이다”고 경고했다. 뉴욕·뉴저지한인유권자센터 김동찬 사무총장도 “LA 폭동이 14주년을 맞고 있지만 미국 내 경제상황은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또 다른 폭동이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한인사회가 더 이상 폭동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한인사회의 각성과 정치력 신장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4.29 LA폭동을 되새겨 우리의 것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는 한인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뜻을 모아야 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