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인천하 시대가 열리는가

2006-04-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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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보스턴)

우리나라 개화기 이전의 여인들은 신랑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른들이 정해주는대로 시집을 가야만 했던 것이 그 때의 시대 상황이었다.말이 신혼이지 결혼 초부터 겪는 시집살이는 눈 뜨는 이른 새벽부터 물을 기르며 식구들의 아침밥을 짓는 일을 시작으로 힘든 농사일에 매달리면서 밤에는 바느질과 길쌈으로 밤을 지새우며 살아야만 했다.

피임이 안되던 시절이라 올망졸망한 아이를 낳아 등에 없고 들판에 나가 논과 밭을 매야 했던 고달픈 생활은 그래도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보람도 있었지만 도박과 술에 취한 남편으로부터 걸핏하면 구타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쫓겨나 살았던 가엾은 인생이 한국여인들이 겪었던 슬픔의 삶이었다.한 마디로 한국의 여인들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차별과 억압, 인간의 존엄성은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환경이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라 여겨 체념하고 살아야만 했다. 이들이 지난날의 우리네 어머니요, 할머니들이다.


고통과 한숨 속에 찌들어 살았던 한국의 여인들이 문명이 발달한 오늘과 같은 사회에서는 어떤 변모와 가치관 속에 살고 있는지를 살펴봄이 어떨까 싶다.반듯한 가문이나 지식을 갖춘 남편을 만나 고생을 모르고 행복을 누리고 일생을 살아가는 여인도 있는가 하면, 급속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이기주의와 철부지 사랑놀이에서 쉽게 결혼하고 쉽게 이혼을 해대는 풍토가 오늘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변화된 가족문화의 모습이다.

한국사회가 겪는 이혼은 부부간의 성격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며 경제문제, 가족간의 불화, 배우자의 부정, 정신적 육체적 학대, 건강문제 등이 이혼으로 치닫는 원인이라고 발표되고 있다.이런 이유의 이혼율 증가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선 선진화된
문명이 오히려 이혼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 그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기계와 문명의 이기를 쫓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하고 자식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나 기러기 엄마가 되어야 하는 세태가 되다 보니 세상살이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몸과 마음은 여전히 고달프게 사는 것이 현대인이 겪는 생활 형태다.

이런 모습은 한국여인들만이 겪는 일은 아니다. 온세계가 겪는 일로 놀랄 일은 더욱 아니다.인류역사상 여성은 2류 인생으로 참정권도 없었고 단지 남성의 소유물로 여겼던 것이 지난날의 여인들이 겪었던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성경이나 역사속에 담겨진 여인들의 고귀한 활약상도 찾아볼 수 있다.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어낸 ‘미리암’, 외적을 물리친 ‘드보라와 야엘’ 민족의 위기에서 백성을 구해낸 ‘에스터’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위대한 여인상들이다.
반면에 한국의 역사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활약도 찾아볼 수 있다. 구국의 신념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목숨을 잃은 유관순 열사와 같은 여인상이 있었는가 하면, 교육자로 여명기에 여성교육을 위해 일생을 바친 여성 선각자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 13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요부 정난정을 정경부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여인천하로 한 시대를 호령쳤던 여걸도 있었다.

외척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60년간의 세도정치로 이름을 날린 안동 김씨 문중의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 풍양 조씨 조대비의 세도, 흥선 대원군의 며느리 영흥 민씨 명성황후의 정치 흔적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여인천하로 이름을 떨친 여걸들이다.역사속에 비쳐진 한국여인들이 바야흐로 여인천하의 세상을 다시 꾸며대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격인 국무총리에 한명숙씨가 지명되어 국회 인준을 거쳐 총리에 임명되었는가 하면, 한성 부윤 격인 서울시장 후보에 전 법무부장관 강금실씨가 입후보하고 있으니 한국이야말로 여인천하의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실감한다.한국 외교사상 처음으로 보스턴 총영사에는 여성 언론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지영선씨가 부임했다. 민주적 정치제도의 정착과 남녀평등이란 의식 속에 진행되는 여성 총리나 서울시장, 총영사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척박한 한국의 정치풍토에서 이들 여인들이 펼치는 일들이 역사 속에 잘못 비쳐진 여인천하로 폄하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새 시대를 열어야 하는 한국 정치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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