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리는 자가 되자

2005-10-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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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선(롱아일랜드시티)

가정 사역 첫 강의에서 교수가 “여자들은 오랜 세월을 남자들에게 눌리어 살아 왔습니다. 만물을 살리는 능력이 있는데도 힘에 눌려서 늘 뒷전에서 보조자로 살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내용은 여자들의 ‘살림’을 ‘평생 살림 의사’로 표현한 것이다.‘살림’은 바로 모든 것을 다시 살려내는 것, 죽어가는 모든 것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는 의
미가 담겨 있다. 살림이 무엇인가? 생명을 살리고, 영혼도 살리는 것이다. “집안 구석 구석의 지저분한 것들을 청소함으로 집안 분위기를 말끔하고 기분 좋게 살려내고, 더러워진 의복과 이부자리를 깨끗하게 빨아냄으로써 새롭게 살려내고, 먹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물체인 가족들에게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먹임으로써 자녀의 몸이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능력이 자라게 한다. 또 삶에 지쳐 피곤하게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섬세한 쓰다듬으로 새로운 용기와 힘을 주어 살려낸다.이에다 음악, 미술 등의 예술과 문학으로 다듬어진 교양으로 가족의 존경까지 받는다면 이 또한 막대한 에너지 창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강의시간 중 교수의 끝없는 ‘여성 예찬’은 여학생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었고 잃어버린 자존심까지 되찾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살림’이라는 단어가 ‘살려낸다’는 의미로 재조명되어 여자의 일생에 담긴 의미가 정말 크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나는 어렸을 때,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살림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일하는 사람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차츰 철이 나면서 살림 잘하는 여자들에게 열등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법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기 원하신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가정학을 전공하자 아버지는 줄곧 서운해 하셨다. 그런데 교수의 강의를 듣고서 가정학이 모든 것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을 공부하는 학문이라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우리가 사는 사회는 생존경쟁이 치열하다. 남을 밀어내야만이 자신이 올라설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판단으로 옳지 않은 일을 자행하면서도 자신이 똑똑한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살려내는 일인 ‘살림’은 등한히 하고 오직 자기의 단 한번 뿐인 생에서 남을 제치고 성공하려고, 자신만의 명예와 부를 위해서, 자신만의 미를 위해서 동분서주 지칠 줄 모르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육을 많이 받은 여성일수록 자기 헌신으로 남을 살려내는데 쓰는 시간보다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본다. 물론 단 한번 뿐인 인생인데 자신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 함은 옳은 일이나 자신만의 이기주의가, 자신만의 옹졸함이 행여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까 돌아보자는 것이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에서 “출세한 여자의 좁은 어깨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했다. 우리는 옹졸한 마음으로 나만, 나만 하지는 않는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에서 행여 나만, 나만 하다가 스스로 판 웅덩이에 자기가 빠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겠다.또한 환자 아닌 환자로 세상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자.
화분에 핀 꽃을 바라보며 우리 인생도 꽃처럼 아무도 해치지 않으며 오직 좋은 것만 주면서 살 수는 없을까. 나를 살려내고 가족을 살려내고, 사회를 살려내는 살림 잘하는 여자들이 여기 저기서 꽃처럼 피어난다면 가정이나 우리 사회가 한층 더 밝아지지 않을까. 봄부터 살림으로 씨 뿌리고 땀 흘린 자는 이 가을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미처 살림의 씨를 뿌리지 못한 자는 내년 봄, 많은 살림 씨앗을 뿌려 풍성히 거두는 가을이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살고 이웃도 살고 세상을 살리는 꽃처럼 다시 한번 되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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