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섬기고 싶은 버몬트의 가을

2005-10-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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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어둑어둑한 시월의 뉴욕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서서 다시 어둑어둑한 저녁 여섯시에 집으로 돌아온 버몬트의 시골길. 열두시간 동안 내 눈에 스쳐간 차창 밖의 가을잎새들이 얼굴의 종류로나 숫자로는 수십억이 되겠으나 이름인즉 하나다. ‘가을잎’ 사람에게도 이름이나 숫자로는 수십억이 되나, 실인즉 이름으로는 하나다. ‘인간’ 수많은 인간이 하나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이 진정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 않는 가옥은 허물어지면서 폐가가 된다. 살다가 지쳤는지 허물어지면서 폐가가 된 빈 집들이 버몬트의 시골길에서 가을잎 단풍 색깔에 흔들리고 있었다.

생활 활동의 객사(客舍)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집으로 향하게 하던 가옥, 피곤하던 가족들의 말소리가 창가의 불빛 아래에서 생기를 되찾고 잠들게 하던 가옥, 사람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가옥을 사람들은 오며 가며 매만지기도 하고, 헌데가 있으면 수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가옥의 중요함도 알아가게 되고 자기가 살고 있는 가옥에 깊은 정도 들게 된다. 그런 가옥을 등 뒤에 두고 어디로 갔을까?차를 세웠다. 애원 한자락을 입에 물고 바지 끝자락을 잡는 무성한 잡초 사이를 걸어 빈 집을 들여다 본다. 여기는 미국이니 그래도 세금은 내야 하겠지. 말로만 사람이지 책임을 모른다거나 진정한 사람이 살지 않으면 가정이라는 가옥은 폐가가 된다. 또한 땅위에 사는 사람이 상대를 서로 서로 돌보지 않는다면 그 또한 폐가를 만드는 일이다.


사회가 건강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건강한 것은 돌아볼 줄 아는 배려에서 오는 것 아닐까? 부모가 되어서 아래로 자식은 지극한 정성으로 돌아볼 줄은 알아도 위에 있는 부모에겐 인색하다. 절반의 정도(正道)이다. 사람들은 정상을 좋아해서 산을 타도 정상에 도착을 해야 만족해 하고, 장사를 해도 돈벌이의 정상을 향하여 달음질 치지만 이기기 위해서, 또는 정상을 거머쥐기 위해서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라는 참혹한 질주 보다는 소혜황후가 쓴 ‘내훈’의 내용대로 만시에 조심을 동반하며 상대를 배려해 주려는 준비가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씨앗은 그 모양이 하찮게 작지만 그 내용은 보여주지 않는다. 심어야 내용을 보여준다. 작은 일인 것 같아도 말과 행동에서, 예절에서, 청결과 청렴에서, 그리고 검소에서, 남자로서의 책임과 여자로서의 거짓됨이 없는 최선의 행실에서 정성을 다 해야 상대와 세상에다 기본을 심는 씨앗인 것이고 그 씨앗이 싹이 터서 내용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말이란 그 얼굴이 천개의 다른 모습과 만개의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으니 맘이 따뜻하면 사람의 마음이 한겨울의 온돌방 보다도 따스하고, 말이 차면 사람의 마음이 한여름의 얼음보다 차가운 것이다. 또한 말의 효능이 약효보다 강하여 어려운 사람을 구할 때엔 한마디 말이 백사람을 구하며, 말이 날카로운 날을 세우면 그 칼에 베이는 사람이 천이 된다.
고민하는 자 말에 따라 치료가 되며, 푸념하는 자 말에 따라 위안이 된다. 그러기에 세상에는 사람 사는 집안이 폐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밤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 빛이 되는 전력을 나르면서 길가에 서있는 전신주들이 있다. 내가 너를 지켜주려고 서있는 전신주라면 너는 나를 지켜주려고 서 있는 전신주다.만산을 적시는 단풍의 색깔은 나무 한 그루의 독자적 배려가 아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단풍의 얼굴이 아름답다 말하겠지만 사실은 사철을 지나온 나무들의 무겁고 아픈 다리의 소리 감춘 절규이니라. 아름다움이란 고독의 소산이니라. 너는 아느냐? 무수한 전신주의 핏줄을 빌려 여기까지 왔노니, 이루든 아니든 천개의 바램과 만개의 간절로 여기까지 왔음을 너는 아느냐? 마지막 지점에 와서야 아름다워지는 하루의 노을빛을 등에 업고 나는 말없이 너를 그리다가 단풍잎 색깔에 얼굴을 적시며 여기 사람이 살다 간 버몬트 시골길가 빈 집을 바라보며 섰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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