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속시대를 살아가는 법

2005-10-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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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예비역 준장)

지금 우리는 초고속 시대에 살고 있다. 오죽하면 ‘쌍둥이도 세대 차를 느낀다’는 우스개 말이 나왔을까. 초음속 항공기, 초음파 촬영, 초미니 스커트, 초첨단사업… ‘초’자 돌림으로 표현되는 고속화는 날로 가속도가 붙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하던 낭만은 옛말이 되고, 한 해가 다르게 강토는 변모를 거듭해 가고 있다.세계올림픽대회는 빠르기의 겨루기로 결판이 난다. 많은 메달이 빨리 달리는 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몸뚱이가 100미터를 9.84초에, 42.195킬로미터를 2시간6분대에 주파하는 빠름을 과시하면서… 교통수단도 속도 경쟁이다. 1620년 영국에서 102명의 필그림 파더스를 싣고 신천지 미국을 향한 메이플라워호가 두달 동안 항해했던 거리를 이젠 10시간이면 도달하는 세상이 되었다. 속도가 150배나 빨라진 것이다.


세계에서 우리 만큼 빠른 것을 좋아하는 국민이 또 있을까? 식당에 들어가서 10분을 기다리지 못해 소리소리 지르고, 신호가 바뀌어 앞 차가 출발하는데 1,2초만 늦어도 클랙슨을 눌러대는
조급증, 동남아에 가면 ‘빨리빨리’가 한국인의 별명이 된지 오래다.
엘리베이터의 자동문이 닫힐 때까지 그대로 두지 못하고, 사탕 한 개를 입안에서 녹을 때까지
참지 못하는 성미는 공중전화를 기다리다 화를 삭이지 못해 살인을 범하는 광기로 돌변하기도
한다.기계와 컴퓨터의 속도에 맞추어야 하는 현대인은 기계의 부속이 되고 컴퓨터의 시녀가 되어 자아 상실의 허허로움으로 고뇌한다. 자살이 증가하고 돌연사의 불행을 곳곳에서 겪기도 한다. 무조건 빨리 속도만 내는 게 장땡이 아니라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느린 것 보다는 빠른 것이 좋을 때가 있다. 지지부진한 것 보다 속도감 있는 개혁과 발전을 추구하는 게 역사의 당위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일에는 알맞는 속도가 있는 법,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은 너무 서두르다 실패했고, 조선왕조 말기의 개방, 개혁은 너무 늦추다 때를 놓쳤다. 중국 마오쩌둥(모택동)의 문화혁명은 무분별한 과속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제정 러시아는 개혁을 머뭇거리다 쓰러지고 말았다.흔히 현대를 ‘시테크 시대’라 한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율성은 일과 휴식, 빠름과 느림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아마존의 밀림에서 길을 잃고 며칠을 헤매다 구조된 사람이 있다. 급한 마음에 울창한 숲을 헤치고 달렸는데 실제는 몇 km의 반경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왔던 길도 되돌아보는 겸손과 느긋함의 필요성을 가르친 교훈이다.우리는 빠른 것이 미덕이고, 최고의 가치라 여기던 ‘고속 성장시대’를 살아왔다. 세끼 밥 먹기가 어려웠던 시절,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무지막지하게 달려 선진국 사람들이 200년 걸렸다는 근대화를 30~40년만에 일구어낸 기적에 감탄하기도 했다.그러나 그 댓가는 엄청나다. 무모한 ‘돌진 앞으로’는 졸속을 낳고 파탄을 초래함은 필연이기 때문이다.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 성수대교는 그 대표적 사례다.

“자동차를 과속하면 교통사고를 내고, 공사(工事)를 과속하면 부실이 되며, 사랑을 과속하면 사생아를 낳는다”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과속은 과도한 욕심에서 나온다. 과욕은 능력을 벗어나고, 정상을 일탈하기에 큰 댓가를 치르게 마련이다.OECD 가입을 앞두고 샴페인을 일찍 터뜨린 결과는 IMF를 불러들였다.이제 숨을 고르고 속도를 맞추어야 할 때이다. 수묵화(水墨畵)의 여백이나 산사(山寺)의 범종에서 울려퍼지는 여운이 원래 우리의 모습이 아니던가.

한 발짝 물러설 줄 아는 겸양과 여유, 이는 살벌한 도시의 삶을 촉촉히 적셔주는 낭만이요, 미덕이다. 또 초고속시대에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의 DNA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효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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