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글’을 재조명하다

2005-10-0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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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술래는 한국계 사람들이고, 찾아야 하는 것은 ‘한글날’이다. 필자가 한국에서 교직에 있을 때는 10월이 상달이었다. 민속에서 햇곡식을 신에게 드리기에 가장 좋은 달이라는 뜻으로 10월을 이르는 말 그대로 한국문화를 즐기는 계절이었다.그렇다는 것이 3일의 개천절, 9일의 한글날, 24일의 유엔데이가 모두 공휴일이었다. 기념일이 많다는 것은 그 날들의 뜻을 기리고, 모두의 마음에 깊이 각인하게 된다. 그래서 10월은 ‘문화의 달’이라고 불릴만 했다. 문화는 무엇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가.

문화와 문명은 다르다. 문화가 정신적인 것이라면, 문명은 물질적인 것이다. 문화가 개성이 뚜렷한 특성을 지녔다면, 문명은 누구나 즐기고 이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문화는 삶의 기쁨과 깊이를 주며, 문명은 삶의 편리함을 준다. 문화는 사랑하고 가꾸지 않으면 자연 소멸한다. 문명은 계속적으로 발명 의욕을 충전하지 않으면 침체현상을 보인다. 문화와 문명은 인류 역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쌍두마차이며 이 두가지는 똑같이 창의력을 원동력으로 한다.생명공학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지적에 따르면 쇠젓갈로 식사를 하는 습관이 손가락이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했다는 것은 문화를 말한다. 이 실험 과정이나 결과를 컴퓨터로 집계 분석하는 것은 문명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본다. 세계 각처의 생활 양식이 다양한 것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들을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문명의 혜택이다. 세계에 6천여 언어가 있다는 것은 문화이고, 전화나 인터넷으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교환할 수 있는 것은 의사 교환을 위한 정보 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문화의 달’이라고 할 만큼 즐거웠던 상달이 오간 데가 희미해진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 중심에 있던 ‘한글날’이 빛을 잃은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한글날’이 국경일에서 밀려난 것은 경제 원리 때문이라고 들었다. 내년이면 한글 창제 6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이 날은 국보 제 1급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상은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다.
미국생활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 것 중의 하나는 ‘한글’에 대한 감사이다. 어느 곳에나 독특한 언어생활이 있고, 그 것을 기술하는 글자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생각이 옳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언어에 따르는 글자의 수효가 턱없이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글자를 대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글이 있어 행복하다.‘한글’이란 큰 글, 훌륭한 글, 하나밖에 없는 글, 한국 고유의 글이라는 뜻이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훈민정음’이라 하셨음은 ‘백성에게 올바른 소리를 가르치기 위한 글자’라는 뜻이다. 한글은 위대한 창작품이고, 한국문화의 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의 역사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눈뫼 허 웅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오천 년을 살아오면서 과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가지고 교육을 한 것이 몇 년이나 되느냐? 교육은 나라 발전의 근본인데 그 근본인 교육을 우리는 남의 글과 사상만 죽자고 배웠다’고.일제시대에 일본말을 사용한 것은 고유의 언어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미국생활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한인들이 한국말과 한글 사용하는 것을 막을 권력은 어디에도 없다. 도리어 이를 권장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한 문화가 섞이면서 고유의 개별적인 문화가 더욱 빛나고 그것이 모여 총체적인 풍성함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미국 각처의 초등학교·중고등학교·대학에서 한국어반 개설 붐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정규 과목으로, 어떤 곳에서는 선택 과목으로 하고 있다. 미국 뿐이 아니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말과 한글을 배우려는 열기가 일고 있다. 잘못하면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모르는 한국 2세가 한국 말과 글을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올 지도 모른다. 이렇게 주객이 바뀌는 일이 생기면 되겠는가. 이 책임은 부모의 몫인 줄 안다. 무엇으로 2세들이 정체성을 가지게 할 것인가.우리가 쉴 새 없이 숨을 쉬면서도 공기의 고마움을 잊듯이, 한국말·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는 줄 안다. 정보기술 발달에 크게 공헌하여 더욱 빛나는 한글의 장점에 놀라며, 말만 있고 글자가 없어서 소멸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수출 상품으로 최상의 것이 한글이란 생각을 한다. 한글은 틀림없이 ‘한글’의 뜻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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