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더글러스 맥아더장군

2005-09-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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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성(재미 월남참전 전우회 회장)

맥아더 장군은 6.25전쟁 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수호하여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공적으로 인해 한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사와 존경의 정으로 새겨져 있다.그는 탁월한 군사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고결한 성품과 자유, 반공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용기와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다.누가 무어라 해도 명석한 결단과 용기로 그는 기획하고 직접 지휘한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불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우리나라를 공산주의로부터 구한 은인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동상을 두고 논란이 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의 동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두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꺼지지 않는 자유의 불꽃’ 으로 상징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훼손되는 것을 사전에 철저히 방지함으로써 자유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늠름하게 서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적전선 배후 깊숙한 지점에 충격적인 상륙 돌격을 감행함으로써 북한군의 교통, 통신 선과 병참, 보급체계를 파괴하고 제2전선을 형성하여 워커 장군의 부대가 부산 최후 저지선으로부터 북방으로 공세이전, 진격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 준 것이다.맥아더가 이 전략으로 우회기동의 아이디어를 미 함참을 비롯한 각 군 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득시킨 45분간의 스피치는 너무도 유명하다.그가 결론으로 “인천상륙작전은 실패하지 않는다. 반드시 성공한다. 이로써 수 백만 명의 생명
을 구하게 된다.” 라고 말을 끝냈을 때 회의 참석자 모두는 감동을 받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였다.


이 작전은 월미도 선정, 인천항 작전 상륙 김포 비행장 점량, 서울 탄환의 4단계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이 작전이 순진한 맥아더의 결단에 의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우리나라의 번영의 은인으로서 그를 기억하고 동상을 바라보면서 처절했던 그 당시를 회고하는 일이야 말로 당연한 일이다.인천의 자유공원 안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장군 동상은 지난 1957년 9월15일 인
천 상륙작전 7주년에 제막되었다. 원래 이 공원은 인천항 개항 5년만이 1888년에 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지난 2001년부터 인천의 일부 시민 단체들이 자신들이 평화도시로 선언한 인천의 대표적인 공원에 전쟁 기념물이 있는 것은 문제라면서 동상을 도심에서 떨어진 월미도의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으로 옮기거나 아에 철거 할 것을 주장하여 왔다. 그러다가 올해 들어와서는 몇 개 재야단체가 동상이 ‘제국주의의 상징’ 이라며 거의 매일 철거 운동을 벌여 이에 대해 많은 애국시민들과 재향군인회와 성우회, 해병전우회 등이 강력히 반대하며 동상 사수를 결의하고 있다. 이렇게 간헐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도 정부는 이런 양측 의견에 대해 안이한 태로를 보이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얼마나 우리 민족을 걱정하고 사랑했는지 미 해병대의 참전 이야기를 담은 ‘피의 길, 승리의 길, 영광의 길’ (이성호 저 설우사. 2005년)에서 인용해 본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전쟁 반발 후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될 무렵에 한국전쟁의 실제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그의 공군 전용기인 바탄호에 몸을 실었다. 수원 비행장에 착륙한 맥아더 원수는 지프차 편으로 최전선인 한강 방어선을 들러보기도 했다. 그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한국군은 인민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군은 거의 대적할 수 없을 만큼 인민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사태는 매우 절망적이고 절박한 궁지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순간
적으로 자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가 기획하고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은 북한 적화통일 기도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자유 민주주
주의와 대한민국을 지켜낸 기념비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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