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물(水)을 보며

2005-09-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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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렬(건축가)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거실 테이블 위에 지름이 한자 반 남짓한 도기(陶器)그릇에 청정(淸淨)한 물을 담아놓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물이 더러워질 낌새가 보이면 아내는 곧 새 물로 바꾸어 놓곤 한다. 나는 이런 아내에게 그 연유를 묻지 않는다. 천지신명께 소망을 간절히 비는 마음으로 그리하고 있건 그냥 보기좋아서 그리했건 그 행위에 무슨 까닭을 물으랴.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일테고 담긴 물을 대하는 나 또한 싫지 않으니 묻지 않을 따름이다.

다만 내가 붓을 든 것은 어느새 그 물을 나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과 이를 벗하는 즐거움이 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있음을 설(說)하고 싶은 것이다. 이 한 그릇의 물이 나의 애완수(愛琓水)가 되어 나에게 주는 기쁨을 말이다.애완수! 들어본 적도 없고 사전에도 없는 단어, 나 혼자 그리 이름지어 불러보는 것이다. 우리가 기르는 ‘루비’ ‘로미’가 애완견이라면 이 애완용 물을 애완수라 이름하여 부른들 그리 이상할 것도 없지 않은가.
이 애완수는 애완견과는 또다른 즐거움을 내게 제공해 준다. 그릇에 담아놓은 대로 고요한 모습, 무심(無心)과 무언(無言)으로 어떠한 환경이라도 능히 참을 수 있기에 스스로 편안함을 이 낙관(樂觀)을 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피로해지면 나는 거실로 나와 이 물 앞에 앉아 이를 바라보곤 한다.지금도 나는 이 물을 바라보고 있다. 물은 아름답다. 고요히 고인 물은 고인대로 아름답고 흐르는 물은 흐르는 모양대로 아름답다. 낙수(落水)는 떨어지는 모습대로 아름답거니와 그들 소리
조차 아름답지 아니한가.물은 맑고 깨끗하다. 자신의 모습이 이러할 뿐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마음까지 맑게 해준다. 그 깨끗함으로 남의 더러움을 씻어준다. 물은 어질고 덕스럽다. 가는 길을 막아서도 성내는 법도,
시비 거는 법도 없다. 때려도 맞아도 부서지거나 상처를 입는 일이 없다. 물은 온유하다. 잔에 부으면 잔 속에서, 이렇게 그릇에 부어놓으면 그릇 속에서, 심지어 깊은 땅속 수도 배관 속에 가두어놓아도, 뜨거운 불에 끓여도 그런대로 순응하며 인내하지 않는가.

물은 서로 사랑한다. 물이 물을 만나면 이내 한몸이 된다. 결코 다투거나 배척하지 아니한다.물은 겸손하다. 높은 곳에 머물려하지 않고 언제나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결코 뽐내거나 폼을 잡지 아니한다.
물은 성(聖)스럽다. 만지고 볼 수 있는 모습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닐까. 하나님의 책, 성경, 창세기에 이르기를 태초에 천지창조 이전, 빛이 있기 이전에 물이 있어 그 ‘수면 위를 성령이 운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은 생명이다. 물로서 지어지지 않은 생물이 무엇이며 물의 은혜를 입지 않은 생물이 무엇이드뇨? 어미의 자궁 속 양수 안에서 잉태되고 이와 함께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물 없이 생물이 어이 기(氣)를 얻으며 줄 없이 어미 명(命)을 유지할 수 있겠으며 생물의 윤택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물이 고갈된 생물은 더 이상 생명일 수 없지 않은가.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 이 성스런 이는 모든 생물 속에 존재한다.어찌 이 선한 이의 성품을 배우지 아니할 것이며 이 고맙고 성스러운 이를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어찌 감히 오염시켜 스스로 병들고 자연을 파괴시켜 ‘카트리나’ 같은 대재앙을 자초해 잃어야만 한단 말인가. “항상 녹아있으라. 나는 네가 물이 되길 원하노라. 얼음이 되는 것은 원치 않노라” 그렇다. 아니된다. 얼음이 되어버린 물은 더 이상 물의 구실을 할 수 없다. 본래의 모든 아름다운 성품을 잃고 오로지 위로 위로 떠오르려고만 하지 않는가.물은 또 내게 말한다. “나를 보라. 나에겐 과거의 흔적은 없다. 이 순간만이 있을 뿐이다” 한 그릇의 이 무심한 이가 고맙기 그지없다. 이 아름다운 이와 사귐은 얼마나 큰 위로요, 즐거움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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