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미국의 정신’ 되살려야

2005-09-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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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인들이 미국에 이민하기 시작한 초창기만 해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그리고 가장 강한 나라, 개인들의 소득이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높고 최고의 문화수준을 향유할 수 있는 나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만끽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떠나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으로 여겨져 부러움을 샀고 김포공항에서 성대한 전송을 받았다.

미국은 한국에서만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나라보다 잘 사는 미국을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남미로 이민을 갔거나 서독에 광부 또는 간호사로 파견되었거나 월남이나 사우디에 기술자로 갔더라도 미국으로 오기를 원했다. 마지막으로 자리잡고 살 곳으로 미국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생활터전을 잡고 시일이 흘러 시민권을 받고 독수리 여권을 들고 다닐 때는 자신이 「선택한 나라」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뿌듯하게 느끼게 되었다. 지금 이 시대에 미국의 시민인 것이 마치 로마시대에 로마의 시민이 된 것처럼 자랑스러운 때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인들의 이런 자부심이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부강을 자랑하던 미국 경제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돈에 쪼들리고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정부나 민간분야의 비능률로 인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여기저기서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이리하여 9.11 테러와 같은 수모와 뉴올리언스의 참상을 겪게 되었다.

최근 유엔 개발계획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에서 살기좋은 나라로 10번째라고 한다. 가장 살기좋은 나라는 노르웨이이고 그 다음이 아이슬랜드, 호주, 룩셈부르크, 캐나다, 스웨덴, 스위스, 아일랜드, 벨기에로 유럽 또는 유럽계 국가들이 미국보다 앞서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미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과거에는 미국이 유럽인들에게도 선망의 나라였다.

남북전쟁 이후 1차대전 때까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유럽 이민 행렬이 봇물을 이루었다. 그런 미국이 어찌하여 유럽에 뒤떨어지고 있단 말인가.
미국을 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나라로 만들고 미국인을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끝없는 개척정신과 과학적 진보를 밑바탕으로 한 막강한 경제력과 자유민주주의이다. 미국인들은 서부를 개척한 정신으로 비즈니스를 일으켜서 라커펠러와 카네기 같은 전설을 만들어 냈다. 이 개척정신은 과학과 기술분야에서도 창조적으로 발휘되어 오늘날 인류문명의 이기는 모두 미국인이 만들어내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한 제도인 자유민주주의도 미국이 완성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같은 개척과 진보, 창조가 더 이상 미국의 독점물이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에 뒤지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오늘날 세계의 특징은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이 어렵기 때문에 미국이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위치를 지켜나가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국제적인 분업과 다국적 기업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에는 어느 한 나라가 경제적 부와 기술을 독점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과거처럼 미국 독주시대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데는 아무
도 이의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지금처럼 추락하고 있는데는 이와같은 시대적 변화에 따른 외적 요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외적 환경보다도 내적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항상 새로운 변화와 도전이 있기 마련인데 이 변화와 도전에 잘 대응하여 극복할 수도 있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패배할 수도 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은 분명히 외부세력의 침입에 의한 것이지만 로마는 이미 외부세력을 물리칠 수 없을 만큼 무능하고 나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멸망했던 것이다. 미국에 지금 불굴의 개척정신, 과학기술의 탐구정신이 살아 있는가. 바로 그것이 관건인 것이다.

지난번 뉴올리언스의 한 이재민이 TV 인터뷰에서 하는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한 마디로 말하여 “정신을 빼고는 모든 것을 잃었다(I lost everything but sprit)고 했다. 모든 것은 잃었으나 정신은 잃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 미국의 개척정신이 살아 있다면 미국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욕하고 곳곳에서 반미소동을 벌인다고 걱정할 것 없다. 그렇지만 미국이 더 이상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란 사실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대통령 이하 모든 국민이 미국의 정신을 새롭게 하고 밖으로 국력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내실을 다짐하는 국가적 목표를 재정립할 때이다. 이제 미국의 일부가 된 우리 한인들도 이러한 미국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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