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말의 폭력

2005-09-15 (목)
크게 작게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우리는 요즘 말의 폭력에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 있다.난무하는 그 폭력은 거대한 힘을 지녀 아무런 힘이 없는 우리들은 쉽게 상처받고 있다.그 배타적이고 강제적인 힘은 건실하게 살려는 다수에게 세상 살 맛을 잃게 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의 이성을 살짝 돌게 만들려 한다.한국 사람이 언제부터 그렇게 잘 살았다고 1억, 10억, 100억 하는 소리가 너무 쉽게 나오고 있다.

지난 7월 주미대사 사임의사를 밝힌 홍석현씨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삼성이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에게 전달하는 정치자금 심부름으로 대기업 간부와 나누는 대화가 녹음된 X파일 녹취록에서 “15개는 괜찮은데 30개는 너무 무겁더군”하고 말하는데 30개는 30억원, 즉 1개가 1억원이었다.
그런데 최근 한겨레신문 보도에 의하면 또다른 30억원은 중간에서 홍씨 본인이 착복했다고 한다.


얼마전 막 내린 제 5공화국 TV드라마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일해재단 성금 내역으로 재벌 회장들이 ‘나는 3억’, 8억, 10억 등등 너무나 쉽게 내뱉은 말들이 모여 598억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이미 우리는 5.18 특별법으로 인해 공개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불법자금 수수총액이 2,000억원
이 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3,000억원 이상이라는 보도를 들은 바 있다.
너도 나도 쉽게 “억 억” 하는데, 1억은 열심히 일하여 1주일 후 혹은 2주일후 따박따박 주급을 받는 성실한 샐러리맨들에게 참으로 만져보기 어려운 돈 아닌가.

나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80년 3월 모 잡지사 수습기자 월급이 13만원, 수년이 지나 중견기자가 되면서 받은 월급이 54만원이었다. 당시로는 꽤 되는 보수였다고 기억하는데 좀체로 억대의 개념은 잡히지 않는다.대부분의 한인들이 자동차 모기지다 집값이다 보험료다 정기적으로 내는 돈이 많다보니 엄청 잘되는 개인 비즈니스를 하지 않는 한 평생 목돈 한번 만져보기가 쉽지 않다.그야말로 한국을 떠나기 전 액수 개념이 그대로 남아서인가, 도대체 억대 숫자는 감을 잡을 수 없지만 대다수 성실하게 인생을 살려는 사람들에게 세상 살 맛 떨어지게 하는 금액인 것은 알고 있다.

멀쩡한 샐러리맨의 사기를 하루아침에 떨어뜨리고 한푼 두푼 모아 열심히 살려는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일확천금 꿈을 갖게 하고 급기야 물질에 급급하는 돈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아무리 용을 써도 평생 올라가지 못할 나무지 하여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다 우울증에 염세주의에까지 빠지게도 한다.우리 한인들은 이러한 허구의 숫자놀음에 더 이상 속지말자.
너도 나도 쉽게 “억 억” 하는 그 폭력에 동요되지 말자. 우리가 그 돈을 차고 앉아 전 국민의 욕설과 조소를 받는 입장이라면, 가진 것이 많다고 하여 없는 사람보다 그 인생이 더 행복할까?

국민의 돈을 슬쩍하고, 노동자를 착취한 돈을 아버지가 물려주었다 하여 자손들은 그 아버지를 존경할까? 자녀 역시 “저 아버지가 국고에서 착복한 돈으로 저렇게 잘 살지”하며 주위의 조소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본인들은 못느낄 지라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는 한국에 나가면 ‘돈을 물쓰듯’ 하고 뉴욕으로 온다. 언니 오빠들은 성실히 일하여 모은 돈을 내게 용돈으로 주고 나는 그 돈으로 예쁜 옷도 사고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며 행복감을 만끽한다.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어떤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다. 내게는 그것이 수십억, 수백억, 수천억 남의 돈을 자기 창고에
쟁여두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측은해 보이는 이유다.

날카로운 말 한마디로 사람의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보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회에 살고 싶은 것도 같은 이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