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어탁수(一魚濁水), 뉴욕이 시끄럽다

2005-09-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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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재(은행인)

아무리 말품을 팔아 밥을 먹고 사는 방송사라 말이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백명의 성금 기탁자들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경위야 어찌됐던 정중하게 사과하고 기탁금 내역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혀 동포사회의 양해를 구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시종 변명과 책임 회피로 일관하면 헌금자 입장에서 누구라도 묵과할 리가 없다.

필자도 기부자의 한 사람으로 몇 가지 시비곡직을 따지고 싶지만 거두절미하고 정말 한가지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화급을 다투는 수재의연금을 모아놓고 8개월 동안 현지에 전달하지 않은 것이 상황 여하를 떠
나 정말 잘 한 일이라 생각하는가를 해당 방송사 측에 묻고 싶다.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낸 당시의 쓰나미는 천지가 무너지는 아비규환이었고 가족과 가옥을 잃은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모진 목숨을 한탄했고 하늘을 원망한 생지옥이었음이 이번 뉴올리언스 지방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참상을 겪어 재차 확인까지 되면서 치
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따끈하게 마실 물과 음식이요, 우선 몸을 감쌀 담요 한 장이다.

이런 핑계 저런 구실로 송금이 지연된 뒤 급한 불은 꺼졌을 터이니 이제는 평생 먹고 살 기술학교를 세워준다? 이를테면 물고기를 줄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그물을 사주고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뜻일 터인데 갸륵한 생각이 눈물겹다만 피눈물로 망연자실한 그들에게 태평가를 부르는
가? 아니면 철학 강의 하는가? 이거야말로 굶주림과 질병으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응급조치는 뒤로 미루고 공부하고 기술 배워 잘 먹고 잘 살라는 얘기 아닌가.


진솔한 사과와 추후 대책의 제시도 없이 메밀묵에 이빨 자랑하듯 중장기 계획을 내세우는데 성금으로 학교 세우고 운영자금 모자라면 자기 주머니 털고, 그도 안되면 과부 장변을 내서라도 끝까지 학교 운영 할 것인가. 10원의 이문을 보고 십리를 뛰어가는 장사꾼도 아니고 국제적 호
혜원칙에 입각한 반대급부나 국가 대 국가간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산업교역의 주체도 아닌 일개 언론매체의 구상 치고는 가상하나 신뢰를 잃으면 죽도 밥도 될 수가 없다.

의식할 수 있는 머리를 가졌다면 생각을 좀 해 보라. 그 돈이 어떤 돈인가? 먹고 마시는 맹진사 아들 결혼부조금도 아니요, 노래하고 춤추며 흥청거리는 황부자 영감의 환갑 축의금도 아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나 내는, 이런 경우 줄초상도 아닌 떼죽음에 급하게 쓰여질 부의금이다. 왁자지껄 식당에서 밥 먹고 부녀자들끼리 건네주고 받고 하는 계돈 뭉치가 아닌 만인의 비통한 마음이 깃들어 경외스럽고 함부로 만지는 것 조차 조심스러운 돈이다.이 부의금을 8개월이나 되도록 움켜쥐고 꿀먹은 벙어리로 버티고 있었던 간 큰 남자가 요즘 세상에도 있다니 옛날 제갈량의 후계자 강백약이 환생한 듯 싶다.

가족이나 친척끼리 친목계를 운영하면서 한달 회비 겨우 기십달러씩 만지는 회계 책임자의 경우도 단돈 한푼 착오가 생길까, 행여나 잘못된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면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 처리해야 하는 것이 내 돈이 아닌 공금의 정체성이 갖는 위력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될, 소위 필요악이라는 물건, 개도 안 물어가는 돈. 이왕 돈 얘기가 나왔으니 사족을 달자면 남의 돈을 무서워 않는 사람들 가운데 빚 지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고 이런 사람들 중에 빚 떼어먹고 ‘내 배 째’ 하는 도적들이 꽤 있다. 이런 부류들은 선량한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정말 인간적으로 정이 안가는 족속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무리들을 경계해서 나온 얘기가 재산분명대장부(財上分明大丈夫)란 말로 ‘세상을 살면서 돈 문제만은 칼같이 깨끗하게 처신해야만 대장부’라 했다. 졸장부가 되지 않으려면 라디오 코리아는 이제라도 진솔하게 사과하고 성금 입출금의 내역을 단 한 페니의 누
락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밝혀야 된다. 그래야만 실추된 명예를 되찾는 것이고 동포사회에 기여하는 공인으로써 도덕적 법률적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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