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15 인천상륙작전

2005-09-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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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센트럴 커네티컷주립대 경제학 교수)

4년 전 테러가 일어난 9월 11일, 한국에서의 9월 1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역사를 돌아보면 이씨조선은 이씨(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고 또 다른 이씨(이완용)가 망쳤다. 국민의 분노를 일으킨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우리나라를 일본이 합병하는 구실이 되었다.
1910년 8월 22일에 이완용의 배반과 매국으로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정책 하에서 35년간의 온갖 고초와 시련을 겪었다.

세계 제2차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나라가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과 감격도 잠시뿐, 38도선으로 나라가 분단된 비극을 겪었다. 금년은 제 60회의 광복절을 기념하였다.분단의 슬픔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이북에서 인민군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이라는 반만
년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참사가 가중되었었다.이와 때를 같이 하여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긴급회의에서 9 대 0으로 이북군의 즉각 중
지를 가결, 통고하였다. 그러나 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틀 후인 6월 27일에 다시 동 이사회가 모여 7 대 1(소련은 여전히 결석, 인도와 이집트는 기권, 유고슬라비아만 반대표)로 남한을 지원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미군을 한국에 파병하고 7월 8일에 맥아더장
군을 UN군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동안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를 계속하여 9월에는 포항-대구-낙동강을 이은 경상북도 이외에는 모두가 점령되었다. 9월 5일에는 포항을 지나서 경주와 영천 근방까지, 그리고 대구도 위협을 당하는 정도였었다.
반면에 UN군 측에서는 부산항을 이용하여 군자재의 확보, 최후의 방어선 안에서 인력의 강화를 계속 추진했었다. 반격하는 작전을 위해 맥아더장군은 일본으로 갔었다.

맥아더장군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전문가에게 물은 첫번째 질문이 “남한에서 언제 벼를 수확하느냐?”였다고 한다. 답은 9월이었다. 군사 전문가인 장군의 원래 계획은 인천상륙작전을 10월에 예정했었다. 그러나 남한 인구가 필요로 하는 쌀을 확보하기 위하여 참모들에게 급히 날짜를 한달 앞당겨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마나 다급하고 서둘러야 되는 큰 수고를 하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따라서 대성공을 거둔 인천 상륙은 밀물이 가장 높은 날인 1950년 9월 15일에 개시되었다. 미해병 제1사단, 보병 제7사단을 위주로, 해군과 공군의 지원하에 과감히 작전을 세운 맥아더장군 덕분에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였다. 9월 13일에는 미 제1기갑사단이 낙동강의 방어선에서 북진작전을 시작하여 경부선이 이어지고 인민군은 독안의 쥐가 되어 10만명이 포로가 되었다.

드디어 9.28의 서울 수복이 실현되었다.압록강 가까이 UN군이 진격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기까지 국토는 황폐되고 백의민족은 너무나 처참한 전쟁의 경험을 반복했다.역사가들은 맥아더장군과 트루먼대통령은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장군 자신이 대통령 되기를 꿈꾼 적도 있었다. 어쨌든 1951년 4월 11일 트루먼대통령이 맥아더장군을 UN군 사령관 직책에서 해임한 사실로 역사의 한 면을 알 수 있다. 그가 귀국했을 때 국민은 개선장군으로 환영하였다.

8일 후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였는데 끝맺음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웨스트포인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전쟁 때마다 크나큰 공을 세운 맥아더장군의 공헌을 알자는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군사 뿐만 아니라 남한의 식량문제까지 고려한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감사의 마음이 그치지 않는다.금년은 9.15의 제 55년이 되었다. 인천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이런 사실을 기념하기에 족하다. 요즈음 일부 젊은이들이 그의 동상을 없애자는 의견이 있다는 기사를 읽고 그저 한탄하는 느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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