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래말을 바꾼다

2005-09-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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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동요 중에 ‘누구하고 노나’가 있다. ‘73년 학교를 시작할 때의 일이다. 개교식에서 다 같이 부를 노래를 찾느라고 동요책을 모아놓고 알맞는 노래를 찾다가 쾌재를 부르며 이 노래가 안성맞춤이란 생각을 하였다. 꾀꼴꾀꼴 꾀꼬리 누구하고 노나/꾀꼴꾀꼴 꾀꼬리 꾀꼬리하고 놀지/개
굴개굴 개구리 누구하고 노나/개굴개굴 개구리 개구리하고 놀지.
곡이 부르기 쉬운 것도 좋지만, 노래말이 마음에 들었다. 참석자가 함께 이 노래를 부른다면 말없이 숨은 뜻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한국학교에 처음 등교한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목소리를 합쳐 ‘누구하고 노나’를 부른 것이 30여년 전의 일이다.

‘노나’는 ‘놀다’라는 말에서 왔고,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지낼 때 누구하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경우 같은 그룹에 속한 친구를 찾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앞의 동요를 택한 것이다.또한 ‘놀다’를 ‘살다’ 즉 목숨을 이어가는 ‘생존’의 뜻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빵과 서커스’에 관한 글이 있는 것으로 안다. 빵은 의식주를 말하고 서커스를 오락이나 레크리에이션으로 해석해 본다. 군주론에서는 국민이 서커스를 즐기는 동안
정치에 참견하는 것을 견제하는 데 목적을 둔 줄 안다.그러나 ‘빵과 서커스’를 삶의 요소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의식주가 충족되어도 거기서 만
족하거나 삶의 뜻을 찾지 못한다. 즐거움이 있어야 하고,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누구하고 노나’는 ‘누구하고 사나’로 바꿔 볼 수 있다.


같거나 비슷한 환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면 서로 이해하기 쉬워서 바로 친숙해진다. 반면에 서로 다른 점이 많은 사람과는 마음을 주고 받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자연히 끼리 끼리 모이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마치 꾀꼬리는 꾀꼬리하고, 개구리는 개구리하고 노는 격이다.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르면서 사물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문득 노래말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꾀꼬리도 개구리도 제각기 가지고 있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누구하고나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하고 노나’의 답은 당연히 ‘누구하고나 놀지’ ‘누구하고나 살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다. 다양한 인종이 모였기 때문에 인종차별에 예민한 나라이다. 여기에 이 나라의 귀추에 주목하고 있는 세계인들의 눈이 번쩍인다. 그런데 요즈음의 유럽이나 한국에서
도 이런 문제가 대두되는 것으로 본다.

유럽의 나라들은 과거의 식민지에서 온 사람들이나 한때 국가적으로 고용한 외국인들의 계속 거주로 사회 문제가 큰 것으로 본다. 한국에는 외국인 고용인이 30만명이나 된다고 하니까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더 많은 민족들이 함께 생활하게 될 줄 안다. 그렇다면 우리들 각자의 생각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각 민족 문화에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차별이 없이, 다만 ‘다르다’는 차이만 있다는 논리가 각 민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서로 다른 특색을 가졌지만 같은 인류임을 마음에 각인해야 할 것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꾀꼬리가 개구리의 친구가 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다양한 친구를 사귀는 일이 내 자신이 더 넓게, 더 크게, 더 깊게, 더 다채롭게, 더 뜻있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마다할 수 없다. 나와 다른 것을 기피하는 마음을 훌훌 털고, 내 손을 먼저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용기가 필요하다.이렇게 사귄 새로운 내 친구들은 내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정신적, 물질적 재산을 반기고, 이를 즐길 것이다. 이 재산은 바로 우리 고유의 문화를 말한다. 노래말 한 마디를 바꾸니까 더 넓은 세상, 더 높은 하늘이 보이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다시 이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른다. 꾀꼬리는 누구하고 노나/꾀꼬리는 누구하고나 놀지/개구리는 누구하고 사나/누구하고나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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