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9월을 맞으면서

2005-08-31 (수)
크게 작게
여주영(논설위원)

올해는 날씨가 유난히도 덥다 싶더니 벌써 가을을 알리는 9월이다.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숫자 가운데 이 아홉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좋은 글자이다. 왜냐하면 여덟까지는 덜 영근 것이지만 9는 화투에서처럼 마지막 열을 잡기 직전의 마지막 숫자이기 때문이다. 일년은 열두 달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속이 찬 달, 가장 속이 찬 숫자가 바로 아홉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9자를 쓰게 되면 전부 다 길흉을 따질 때 ‘길(吉)’로 치고 있다.

일년 열 두 달 중 10월은 정확하게 말하면 마지막을 말한다. 모든 수확이 다 이때 끝나기 때문이다. 또한 11월, 1, 2월은 휴지기라서 거의 공백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9월은 연중에서 가장 풍성하고 꽉 찬 달이다. 그래서 결혼도 사랑이 익어서 열매가 맺는 것과 같이 이 9월에 많이
하고 출생률도 보통 어느 달보다 이 달이 제일 높다. 9월에는 사람들이 모두 옷 같지도 않은 여름옷 다 벗어버리고 정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는 뭐
든 먹고 살만해야 윤리도 생기고 도덕도 생긴다고, 9월이 우리한테 주는 의미는 풍족함이 있어야 정장도 하고 싶고 뭐든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남도 돕고 주위도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9월은 바로 이런 풍부함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차분해지고 들뜨고 시끌벅적하던 여름과는 달리 윤기 있고 차분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리란 많은 것을 갖고 또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때 자기본연의 존엄성을 찾게 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찾고 싶어도 안 찾아진다. 우리가 옛날에 ‘가난은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단지 불편할 뿐’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런 얘기는 현대에 와서 가난은 불편한 게 아니라 어찌 보면 죄일 수가 있다. 왜? 인간 스스로가 자기를 찾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것이 가난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9월은 가난을 부정하는 달, 어느 때보다 풍요가 넘치고 여유로운 달이다. 과일이나 벼이삭이 누렇게 영글고 속이 꽉 차 고개를 숙이는 달 9월, 이 여유 있고 풍성한 달, 잠시 서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정치도 좋고,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이 다 좋다. 그러나 정작 9월이 가르쳐 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눈앞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장사를 하면서 과연 1년 중 9월 같은 그런 달을 맞아 들였는가. 우리가 사회에서나 단체 활동을 하면서 9월 같은 그런 활동을 했는가. 집안에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꽉찬 9월 같은 관계를 가져 봤는가. 한인사회도 무슨 무슨 회다, 봉사단체다 이런 저런 이름 붙여놓고 있는 단체들의 숫자가 좀 많은가. 그러나 그 단체들의 활동 중에서 일년 열두달 중에 9월이 가르쳐 주는 그런 9월을 가져 봤는가. 혹시 우리는 추운 1월을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은 익기도 전에 낙엽이 지는 11월을 우리가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땀만 뻘뻘 흘리는 7,8월을 여전히 가고 있는지..무엇을 하더라도 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중 9월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찾아오는데 우리 생활에 9월은 진정 우리에게 찾아오는가. 제대로 가져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느껴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공백기를 맞는 것은 아닌지.. 가장 중요한 시기가 9월이다. 이제까지 달려왔던 시간들을 멈춰 서서 지금까지 땀흘려 심어놓은 온갖 것을 어떻게 거둬들이고 추수하느냐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잘 가꾸고 심었어도 추수를 안하고 열매를 따지 않으면 모든 건 헛것이다. 눈으로 반드시 봐야되고 손으로 분명히 잡아야 된다.

9월의 풍요는 눈앞에 왔는데 지금 플로리다 남부에는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 수백만명의 이재민과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피해가 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다. 또 유가 폭등으로 인해 미국의 경제가 앞으로 ‘위기’라는 설이 잇따라 나오면서 가뜩이나 빈곤한 서민들의 마음에서 풍요를 앗아가고 있다. 허지만 이 9월에 우리가 아무 것도 만지고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다가올 공백기를 이겨낼 재간이 없다. 부지런히 뛰고 또 뛰어 무엇이라도 이 9월에 거둬들이고 결실을 보아야 한다. 풍요는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