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슴 섬뜩한 반미 친북 여론조사

2005-08-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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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

얼마 전 한국에서 군복무 연령층의 청소년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는데 “만약 미국과 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느 쪽을 돕겠는가” 하는 설문에 청년들의 3분의 2가 놀랍게도 북한을 돕겠다는 대답을 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보도였다.

지금 아무리 정부의 정책이 햇볕정책이니 뭐니 해서 북한을 감싸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 형식상으로 북한은 아직 우리와 서로 총을 겨누어 대치하고 있는 엄연헌 적국(敵國)이며 미국은 우리를 적으로부터 공동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를 지켜주는 동맹국인데 청년들의 생각이 이제
적이 친구로 친구가 적으로 바뀌었다고 들리니 이는 예사로 들어 넘길 일이 아니다.이런 조사 결과는 한국의 대부분의 청년층이 반미 친북 성향으로 유추해 버릴 수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더러 친북 반미 성향의 청년들의 난동 사례들이 있었어도 그저 어디에나 벌레 먹은 사과는 끼어있게 마련이니까 그런 성향의 부류도
있으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던 터였다.


더구나 지금의 소위 개혁적이라고 부르짖는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 젊은 층의 사회관이 종래의 모든 보수적인 사고에 막연한 반대를 일삼는 경향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친미라면 보수적인 생각이라 치부하고 반미로 생각해야 개혁적 신사조(新思潮)에 동조하는 것으로 착각
하는 경향이 생겼다.그렇다면 한국의 청년층이 이 설문의 대답처럼 과연 그 대다수가 친북 반미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이 설문에 대한 대답의 3분의 2라는 큰 수의 청년층이 설사 북한을 돕겠다는 답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3분의 2라는 다수의 우리 청년들이 친북 반미 성향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이번 설문에 중대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중요한 초점은 이런 대답을 하게 된 청년들
의 사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런 결과를 유도하게 된 여론조사 설문에 함정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반응은 여론조사 기관이 적절하지 못한 설문을 내놓아 이런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유도했다는 점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할 적에는 단순히 두 나라 사이가 전쟁 상태가 된다는 것으로만 간단히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 전쟁의 원인이나 배경이 필경은 남한의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는 전쟁은 상상할 수 없다. 말하자면 어떤 이유였던 간에 그 전쟁은 곧 남한과 북한간의 전쟁상태인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과 북이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데 북한편을 들겠다고 하면 곧 적의 편에 서겠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답을 한 청년들이 이런 전제를 가지고 적을 돕겠다는 뜻으로 이런 답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우리 청년층이 친북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번 설문의 성격부터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설문의 형식에 따라 그 대답이 어느 특정 방향으로 유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전화로 텔레마케팅을 하는 세일즈맨이 “오늘 저녁 집으로 방문해서 면담을 하고 싶은데 방문해도 좋겠습니까?” 하는 식으로 전화하는 사람은 없다. 필경 무슨 핑계를 대고 만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일즈맨은 언제나 “내가 그곳을 방문하는 길인데 오늘 저녁이 좋습니까? 내일이 좋습니까?” 하는 식으로 묻는다. 이러면 손님의 선택은 오늘 아니면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에 거절하기가 어려워진다. 유도심문의 전형적인 예를 든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론조사에서 북과 미국이 전쟁을 하게 되는 사태는 제시했지만 어떤 배경에서 시작된 전쟁이라는 전제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많은 청년들은 형제요, 동족인 북을 돕는 것이 당연한 의리라고 생각하고 답한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이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원인으로 북과 미국이 싸운다면? 하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유도심문과도 같은 설문을 내놓은 부적절한 여론조사 기관의 졸작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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