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북 분열을 즐기는 사람들

2005-08-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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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옥(전 고교 역사교사)

1802년 나폴레옹은 군주제 유물인 훈장제 재도입 반대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열정은 영예이다. 그것을 진작 배양시키기 위해선 훈장이 필요하다. 사람은 그런 장식품에 끌리기 마련이다”
훈장이 돈을 대신함으로써 바닥이 보이는 그의 금고를 더 오래 지킬 수 있었다.

‘평등’이란 통치자에 의한 불평등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탐욕스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돈임을 확신했다. 휘하 장군 연봉은 소국을 운영할 수 있는 액수인 100만 프랑이 넘었고 명예, 재화, 향락을 담보로 헐벗은 병사들로 하여금 험준한 알프스산을 넘게 했다.주민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는 화려한 정치행사가 필요함을 믿고 처음 시작한 것도 그였다.
혁명이 창안해낸 ‘평등’ ‘국민’ 등 기만적인 용어를 조화시킨 통치 하에서 국민은 어려움을 잊고 목숨바쳐 싸웠으나 이제 그 제국은 찾아볼 수 없다. 전위대를 앞세운 레닌이 계승 확대 발전시켰는데 오늘날 북녘 정권을 통해 이를 경험할 수 있다.


좌우로 나뉘어진 남쪽과 북녘에서의 화려한 광복절 행사는 가곡 ‘아이다’의 중간장면을 보는 것 같다. 지난 60년간 분단을 더욱 고착시킨 사람들이 통일 전야에나 있을 불꽃놀이에 프랑스 포도주로 건배하는 모습은 70주년 아니 100주년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기쁨에 들떠 있다.화려한 정치행사에 마취된 전위대와 무기력한 자유민주 주역들이 기만적이나 거부할 수 없는 외관의 깃발을 들고 ‘우리는 하나’라면서 소멸해가는 통일 의지를 대용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산의 고통을 참고 사는 가족을 끌어낸 영상을 통한 상면 연출은 절망감 마저 갖는다. 누렇게 뜬 얼굴에 애들이 갖고 놀기에도 위험스런 훈장을 주렁주렁 매달고 정치이념을 들먹이는 북녘인들의 모습은 측은하기까지 하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식품 하나를 더 달기 위해 백성을 얼마나 더 괴롭혀야 했고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그들의 고통은 얼마나 더했을까.노동자 가족이 공원에서 즐기는 북녘 화보를 보면 차린 음식은 제사상을 연상케 한다.

기계를 돌리는 노동자나 이삭 줍는 농부의 얼굴엔 항상 웃음이 있다. 논밭에 들어갈 이유가 없는 지도자는 농림모에 볏단을 든 채 웃고 있다. 배우를 동원해 찍은 사진을 합성한 것들이다. 모두가 웃음꺼리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망판만한 훈장을 여럿 달고 수령이 있는 화려한 정치행사에 서있을 때 개인적 희열은 자신의 배고픔도 잊고 광란의 정치열정으로 독재자에 더 충실해질 것을 약속하게 된다.이런 무리들이 주역이 되는 통일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파괴적일까를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자
유민주 신봉자가 구경꾼이 되고 이런 무리가 주도한 통일 후의 예상되는 폭정에 비하면 우리가 경험한 독재는 교실에서 체벌 정도 밖에 더 될까.
8월 29일은 한민족이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이다. 8.15의 경축의 의미가 그것을 호도하는 겉치레에 불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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