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버·버 족

2005-08-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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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예비역 준장)

‘어버버족’이란 외국서 살다 들어와 활동하는 10대 연예인에게 어느 작가가 붙인 이름이다. 이들에게 기상천외한 별명을 붙이게 된 그 분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요즘 방송에는 외국서 살다 들어와 활동하는 10대 연예인이 부쩍 늘었다. 세계화 시대 - 이민 2세대는 국적은 외국에 두고 있으면서 국내의 안방극장을 드나드는 시대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같이 외국인처럼 행세한다는 것.우리 말이나 문화를 모르는 걸 당연시하는 듯 하다.

어느 날 그들이 나오는 오락 프로그램을 함께 보던 조카가 짜증을 부리며 “저 가수는 왜 우리말을 모르지? 꼭 어 버 버 하는 거 같아”라고 했다.
퀴즈 형식을 본떠 만든 그 오락 프로그램은 우리말을 재치있고 순발력 있게 구사해야 의사소통이 될 터인데 그들로서는 그게 무리인가 보다. 조카 녀석은 그들이 ‘된장국’이 뭔지 몰라하거나 ‘광개토대왕’을 ‘가개토대와’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그 날 이후 우리는 그들을 ‘어버버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미국에 일곱명의 조카가 있다는 어느 후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중우리말을 제대로 하는 아이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처럼 만나도 기껏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 정도가 고작이고 그 이상의 대화는 진전되지 않는다고 한다. 대화가 없으니 교감이 있을 리 없고, 마음을나
누는 교감이 없으니 서로 깊은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형식적인 핏줄의 연대감을 의식할 정도라고나 할까. 더구나 개인주의 사고에 길들여진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랴.같은 미국에 살면서도 중국인이나 유대인은 집에서 자기 나라 말을 쓴다. 뉴욕 시내에서 유대인 할아버지와 손자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길을 걸어가며 쉼 없이 자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코흘리개 손자 손녀를 무릎에 올려놓고 모세의 율법, 탈무드를 수 천년 동안 일러주며 내려온 것도 유대인들끼리 쓰는 자기네 말이 아니던가. 대대로 속속들이 가슴으로 전해오는 그들의 정신문화는 이천년의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세계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중국인이 그토록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도 이런데서 근원을 찾을 수 있다. 13세기, 서하·금·만주를 차지하고 중앙아시아를 평정했던 몽고제국의 징기스칸에게 정복을 당하고도 꿋꿋이 자국의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오히려 정복자를 자기 생활권에 흡수시킬 수 있었던 것도 한자 언어에 바탕을 둔 정신유산의 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 다시 세계적 중심국가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느 나라 사람에게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유대인이나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장점이 많다. 부지런하고 영리하며 역동적이면서도 마음이 여리고 인정미 넘치는 애틋한 감정을 간직하고 있는 민족이다. 동남아계와 중남미계 사람들 보다 외국에서 정착하는데 성공률이 높은 것도 자랑할만한 일이다.

자신의 결함을 인정하고 고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고 성공한 인생을 살아간다. 글로벌화 된 세상을 사는데도 생명 본체의 뿌리는 소중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세종대왕의 말씀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나를 잃지 않아야 상대를 폭 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므로.이 나라 청소년들의 우상인 연예인, 외국에서 건너온 우리 2세의 젊은 연예인들이 더 이상 창피한 ‘어버버족’으로 남아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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