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소근거리는 사회

2005-08-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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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정치 후진국 국민들은 선뜻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한 국가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 국민들의 의식수준과 동일하다>는 것은 거의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의 버릇을 고치거나 길들일 수 있는 채찍은 선거를 하는 국민들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한국에서 유신정치가 태동할 무렵, 당시의 야당 총재였던 이철승씨는 일본에 건너가 오히려 유
신의 정당(正當)성을 선전했었다. ‘사꾸라’라는 비난을 퍼부으면서도 다음번 선거 때 또 그를 선출해 주었다.

그것은 몇십년 전 일이라고 치자. 21세기의 첫번째인 지난번 대선에서 한 지방에서 어떤 후보에게 97%라는 불가사이한 지지율이 나왔다. 선거가 아니라 마치 ‘지역단합 경쟁 대회’라도 치룬 것 같은 결과가 나왔다. 군사분계선만 없지 그 좁은 남한땅을 사실상 몇 조각으로 분할해
놓은 것이다.그러고 나서도 남북통일은 고사하고 갈라진 남한 만이라도 먼저 통일해야 된다는 통렬한 비판의 목소리는 서로의 아픈 곳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배려(?) 때문인지 목구멍에서 채 나오지 못하고 곧바로 ‘임을 향한 행진곡’으로 주제곡을 바꾸어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보는 것이 한국
의 현실이다.


얼마 전 ‘안기부의 X파일’ 사건이 터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는 소위 ‘인권 대통령들’에 의해서 인권 침해가 당한 천인공로할 사건이다. 그렇다고 놀랄 것은 결코 아니다. 일찌기 그들은 정치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기(?)인 거짓말, 위선, 권모술수, 그리
고 뒷거래 등에 탁월함을 인정받아 ‘정치 9단’이라는 칭호가 이번 사건 정도는 예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미국에서 30여년 전에 ‘워터게이트’사건이 터졌었다. 사건의 초점이 ‘과연 대통령이 지시까
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었느냐?’에 집중됐다. 끝내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고 물증도 없이 음모한 것만으로 현직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처벌받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한편으로 한국에서는 수년간 범법행위가 자행되었고 하수인이 검거됐고 물증도 확보됐고 처벌할 관계법(헌법에 2개항과 ‘통신비밀 보장법’)도 있다. 그러니 미국식(?)으로 얼른 생각하면 주범, 즉 현직 대통령이 요약된 발췌록을 통해 수시로 보고를 받았는지? 아니면 적어도 도·감청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만 가려내면 될 것 같다.그러나 미국의 사건 해결법과 한국의 것은 태평양 거리 만큼이나 다르다. 한국에서는 사건이 터지자 과연 주범(몸통)이 누구인지는 관심이 별로 없고 자신들도 출세해서 도청의 대상이 됐으면 그 훔친 보따리 속의 내용물이 됐을지도 모르면서 하수인 K씨의 말대로 ‘괴물상자’인 그 속의 내용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그 내용물을 공개해서 그것을 증거로 해서 도청의 피해자를 처벌하라는 것은 피해자만 두번 죽이고 ‘법치주의’는 사라지고 성숙되지 않은 국민의식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치의 전면에서 그렇지 않아도 갈팡질팡하는 정치인들의 시야를 더욱 흐리고 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풍토를 만들게 된다.이 지구상에서 사건 당시에 적용할 펄펄 살아있는 ‘법’은 마취시켜 뒤로 잠재워 두고 ‘특별법’이니 ‘특검법’이니 해서 새로 법을 만들어 공포기간도 없이 소급해서 적용하려는 정치단체는 한국 이외에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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