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를 다시 보자

2005-08-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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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옥(플러싱)

‘독도는 우리땅’ 하는 노래도 있고 ‘바다도 우리 바다인데 일본해’라 하면서 대일 감정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 최근 유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 당했으나 엄연한 주권국가였을 1909년, 중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제쳐놓고 맺는 간도협약은 별다른 말이 없다.

우리 영토를 일방적으로 제 3국이 협약해서 갈취하는 행위를 국제법에 호소해 보라는 동향은 고사하고 인식조차 없어 보인다.중국 전국시대에 가까운 옆나라를 공격하고 먼곳에 있는 나라와는 친구가 되도록 한 정치가 기본적인 사고였다. 그럼에도 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나라의 정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일본과의 접촉을 다시 생각해 보자. 먼 옛날 백제시대 왕인 박삭사가 일본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초청을 받고 논어 1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깊은 지식과 높은 인격으로 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와 황족의 스승이 되어 그는 일본에 글을 가르치고 문화를 창립
하는 첫 발을 밟았다. 이것이 백제 제 8대 왕(234~286)때의 일이었다.
왕 인 박사는 기술공예의 전수, 일본 가요의 창시 등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고 일본 황실의 스승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문화의 창시자였다. 이 역사적 사실은 일본 고전인 일본 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에 기록되어 있고 일본문화의 창시자로 성인으로 존경받고 비조문화(飛鳥文
化)의 원조이다. 왕인 묘와 왕인 진자(神社)도 오사카에 있고 도쿄(동경) 우에노 공원에는 왕인박사 공적을 높이 찬양한 비가 서 있다.

나도 일본을 왕래할 때 직접 가서 본 적이 있다. 그 외 여러곳에 있다고 듣고 있다.일본의 사이매이 천왕은 백제 30대 무왕의 딸이었고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누이동생이었다. 최근 영암군에 있는 왕인박사 유적지를 갔었다. 월출산 아래 박사의 석상과 왕인박사 유허비 박사가 공부를 했다는 책굴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큰 감명을 받았다.
백제는 옛날 삼국시대에 문화 수준이 높았고 정읍사로 이름있는 읍을 통과하고 김삿갓이 57세
의 나이로 방랑생활을 끝내 화순도 멀리서 보고 영산강 경치를 처음으로 보니 뜻깊었다. ‘토인비’가 한 말처럼 ‘바다를 건너가면 문화는 더욱 빛나고 찬란하게 꽃을 피운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일본에서 꽃 핀 문화의 원조는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임진왜란 때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열렬한 애국심은 누구보다 강했고 적장을 안고 투신자살한 논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진주성 촉석루 내 논개사당에 걸려있는 논개 영정이 파괴되고 진주 시민단체들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친일 화가가 그렸다는 것 뿐이다. 잘 한 짓일까?

광화문 등 몇개의 표문이 박정희가 썼다는 이유로 파손된 사실이 최근 있었다. 중앙청 건물이 파괴되고 말았다. 물론 일제시대 우리를 통치했던 총독부 건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수립, 초대 의회와 초대 대통령 취임식도 여기서 했고 일본인 보다 더 오래 사용했고 정도 깊이 든
건물이었다. 그가 대통령 임기 중 파괴했으니 큰 공적이었다고 역사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하여 과거를 배우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대만에서 일본 신사 하나가 원형대로 공원이 되어 일반에 제공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히틀러가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유명한 처형장도 이스라엘 정부 요청에 따라 독일이 하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가 배워야 할 점이 많다.일본이 우리를 강점했던 증거물을 충실이 없애주니 감사할 것이고 일부 우리 지도층이 한 짓이 바로 친일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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