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北 비위맞추기 위한 남북 축구

2005-08-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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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이 된 1945년 8월 15일, 흰옷 입는 수많은 백성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많은 태극기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의아할 정도로 거리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혔다. 해방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그 날을 기록해 놓은 필름만 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해방의 날에 태극기를 흔들었던 노인들이 광복 60주년을 맞는 감회는 벅차고도 남음이 있으리라.그리고 그 후 태극기로 한반도가 뒤덮힌 적이 또 한번 있었다. 지난번 한일 월드컵 축구 때 세계인을 놀라게 한 붉은 악마의 응원이 그것이다.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들에게서 메말라버린 줄 알았던 애국심이 축구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나면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살아났다. 젊은이들이 응원을 하면서 힘껏 휘둘렀던 깃발은 태극기였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던 연호는 ‘대한민국’이었다.

광복절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 한국 최대의 국경일이다. 첫번째는 1945년 8월 15일 일제에서 해방된 날이고 두번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이다. 해방된 날에는 태극기가 물결쳤고 건국된 날에는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탄생했다.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빼면 광복절의 의미는 없다.
이번 광복절 60주년을 경축하여 ‘남북통일 축구대회’란 이름으로 남북한 축구대회가 열린다. 8월 14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는 남자 축구, 16일 고양 종합운동장에서는 여자 축구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구대회에서는 태극기를 흔들지 못하고 대한민국이라는 응원을 하지 못한다.


응원용으로 한반도기만 사용할 수 있다. 서울의 경우 입장권 6만5,000장 중 정부와 시민단체에 4만8,000장을 배정하여 일반 축구팬이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응원에서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한국 축구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붉은 악마도 이 대회의 응원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북 축구는 관제 축구대회의 모습을 드러냈다.
남북 축구대회는 남북간의 친선과 화해를 위해 좋은 행사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최대 경축일인 광복절에 남북 축구를 개최하는 것은 더욱 좋다. 그러나 이 축구대회는 정치적 목적이 있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스포츠 행사이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한민족이 여러개의 도시국가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올림픽경기를 통해 단일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도시국가간 친선을 도모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각기 자신과 국가의 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해 승부했다. 관중들은 자기네의 승리를 위해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그런데 남북 축구를 하는 남한의 모습을 보면 북한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데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마치 상관이나 세력가에게 아부하기 위해 골프를 치거나 바둑을 두는 사람처럼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하기가 짝이 없다. 광복절을 기념하는 남북 축구를 하겠으면 광복의 그 날처럼 태극기가 물결치고 대한민국의 연호가 메아리치는 응원이 나와야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자유국가의 저력이며 민주주의의 다양성이며 우리 국민의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고 무슨 공갈 협박을 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일을 금지하고 인공기를 훼손하는 일이 일어날까 전전긍긍하는 정부가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란 말인가. 북한에 아부하기 위해 혹시 월드컵 4강인 한국팀을 북한팀에 지게 만들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무슨 축구대회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시비를 하느냐고 힐난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은 축구에 국한된 문제만이 아니다. 북한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정부의 자세가 문제이다. 일본의 고이즈미가 신사참배를 한다고 한국이 일본을 때리는데 그것은 신사참배 그 자체보다도 그 저변에 있는 군국주의, 침략주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태극기와 국호를 내세우지 못하는 축구는 남북문제의 본질을 숨긴 채 남북관계의 개선과 평화를 과시하는 위장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지금 태극기와 대한민국을 내세우지 못하는 남북 축구를 큰 문제가 아니라고 치자. 그러나 이렇게 북한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힘쓰다가는 국가의 운영이 북한의 입김에 놀아나게 될 것이고 결국 북한이 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북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남북 축구로 인해 광복 60주년이 신명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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