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끄러움도 모르는 세태

2005-08-1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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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교회 목사)

요즘 뉴스를 보다 보면 알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사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술가들은 알몸(naked)와 누드(nude)를 구분한다. 알몸은 단순히 옷을 벗었다는 의미인데 반해 누드는 자신의 육체를 ‘자신만만하게’ 재구성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 같이 옷을 벗는 행위이지만, 의미 부여가 퍽이나 다르다.

누드는 그리스 시대 때부터 지금까지 회화와 조각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다. 이 말은 곧 누드가 고전 예술과 현대를 잇는 주요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드가 앞으로 어떤 변모를 겪을 것인지, 또 예술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술계는 예의 주시하고 있다.그런 가운데 며칠 전엔 한 미술교사 부부가 나체사진을 홈페이지에 올렸다가 대법원으로부터 음란물 판정을 받았다. 병영 내 알몸 사진들도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급기야는 MBC ‘음악캠프’ 생방송 중 출연자들이 알몸 쇼를 벌였다.
같은 시간대에 일리노이주 파킨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난 로버트 노튼의 이야기가 나왔다. 피오리아 지역의 철도회사에서 37년간 근무한 뒤 1975년 은퇴한 로버트 노튼은 지난 1962년 처음 공공에 알몸을 노출한 혐의로 구속한 뒤 43년간 20차례 이상 같은 험의로 체포됐다. 그는 반복되는 구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체주의는 미국의 헌법에도 보장된 것이라며 법정에서 이웃들이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을 보면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알몸 쇼를 부린 20대 출연자들의 대답이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평소 홍대 앞 클럽에서 하던 대로 자유롭게 공연한 것’이란다. 사전에 계획했다고 당당했다면 누가 무어라 하여도 얼굴을 들고 다녔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얼굴을 모자로 가린 채 20여차례 구속된 자 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둘째,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몰염치한 짓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평소 홍대 앞에서 맥주병도 깨고, 옷도 벗어던지며 공연해 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때와 장소는 물론이고 인기와 일확천금의 유혹에 넘어간 연예인들, 학생들, 주부들까지 들썩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정 영역에만 머물렀던 상업적인 누드가 일반인 대상으로 확대되면서 ‘성 상품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돈이라면 카메라 앞에서 쉽게 옷을 벗는 세상에 대한 자성론이 일고 있지만 ‘연예인도 누드를 찍는데 나라고 찍지 못할 이유가 뭐냐’는 식의 의식이 일부 여성들에게 만연함이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셋째, ‘성질나면 바지 벗는다’가 신조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벗음으로 느끼는 자유, 용기 휴식이 한순간에 탈바꿈 되고 있다는 것이다. 벗음으로써 터득한 자유를 입고서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자유를 온 사회가 함께 체험해야 한다.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벗는 것을 일삼는 무대라면 혐오감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보는 것, 요즘은 듣는 것 보다는 눈에 보여지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어떠한 것이든 정작 본 것, 요즘은 듣는 것 보다는 눈에 보여지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다. 하지만 어떠한 것이든 정작 본질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듣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눈을 감고 객석에 앉아 있어도 재미와 의미를 느낄 수 있는 무대, 거기에는 우리만이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사상과 정서가 깊이 배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성경에도 벗음이 나타난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을 모를 때는 오히려 벗었다. 그러나 옷을 입은 만큼 거짓의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도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도망갔다. 벗음이 우리의 삶 속에서 뗄 수 없는 일이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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