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아빠와는 비교하지 마세요”

2005-08-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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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목회학박사)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노자의 사상이 담긴 <도덕경>을 수없이 읽었는데도 아직도 강한 심성을 가누지를 못한다. 죽을 때 가져가려고 그러나. 아무데도 쓰일 곳 없는 불뚝불뚝하는 성질을 왜 못 버리는지 모르겠다. 유전자일까, 아니면 후천성일까. 아니면 어릴 때, 일찍이 부모를 떠나 살아온 영향 탓일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사업을 실패하였다. 실패하고 나니 그렇게 아버지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한창 아버지가 사업을 흥하게 하였을 때, 문지방이 닿도록 드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 봤느냐”는 식으로 아버지를 떠나 버리고 우리 가족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한 척의 나룻배처럼 되어 버렸다. 읍내의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아버지는 더 시골로 내려갔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식을 일곱 두었는데 그중 다섯 번째인 나는 시골로 내려가지 못하고 남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돼 남의 집에 남게 된 것이다. 부모를 떠나 혼자 살아가며 독립하게 되는 출발점이 너무나 일찍 찾아온 것이다.

방이 세 칸인가, 두 칸인가, 그 집도 그리 넉넉한 집안은 아니었다.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학교도 다닐 수 있기에 낮에는 학교를 다녀왔고 저녁에는 그 집의 아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부모에 대한 어릿광대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어린 나이 열두 살에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며 또 다른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가르치는 아이는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잤지만 불도 잘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방에서 자야 하는 그 추위와 떨림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기억이 새롭다. 밥은 먹어도 항상 배가 고팠다. 늘 떠 오르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다른 형제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여 밤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다음날 일어나면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가끔 화초들을 보며 생각한다. 화분에 심겨져 따뜻한 집이나 온실에서 자라나는 화초는 곱게 잘 자란다. 주인이 물을 주고 항상 들여다보며 잘 길러주기 때문이다. 그 화초는 생명이 다하는그날까지 그냥 잘 자라주고 주인을 위해 산소를 내뿜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방안, 혹은 온실의 장식이 되어주기만 하면 된다. 온실은 비바람도 눈보라도 없다. 그런데 그런 온실의 화초를 비바람이 몰아치고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 없는 뒤뜰 산에다 옮겨 심었다면 그 화초는 둘 중 하나의 길을 가야만 한다. 죽든지 아니면 비바람, 눈보라를 이겨내어 살든지. 누구 하나 돌보아 줄 사람 없는 그 곳에서 그 화초가 살아남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애초부터 온실에서 자라지 않고 들에서 자란 야생화는 또 상황이 틀리다.
이런 어릴 적 환경 영향 때문인지 군대를 갖다 올 때까지도 말이 없는 침울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그리곤, 나도 모르게 나타나는 강한 심성에 의해 곧잘 손해를 보곤 했다. 그 강한심성이란 어쩌면 어릴 때 겪었던 ‘있는 자들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가 아직도 무의식에 쌓여 나타나는 한 증세일 수 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딸 둘을 미국에서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큰 딸은 서울에서 태어나 9개월이 되어 미국에 들어
왔고 둘째 딸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무리 가난하다 하여도 미국에 사는 한인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그 자식들을 굶기지는 않는다. 잘은 못해 주었어도 두 딸을 열심히 잘 키워보려 노력했다. 안타까운 것은 다 큰 두 딸이 아직도 자기 방이 없이 함께 기거하고 있다는 것.

둘이 다 태어나서부터 사춘기를 지나면서도 아름답게 꾸며진 자기 방을 갖지 못하고 자라오게 한 것은 아버지의 무능 때문이리라. 그래도 초등학교 5학년 때 2학년 학생을 가르치며 남의 집 윗방에서 눈물 흘리며 어린 시절을 고아처럼 보냈던 아버지 보다는 났다. 두 딸들이 아버지에게 섭섭하게 할 때엔, 으레 아버지 입에서 나가는 말이 있다. “그래도 너희는 아빠 보다는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라고. 그럴 때면 이구동성으로 “아빠와는 비교하지 마세요”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속에서는 내가 나를 질타하는 그 무엇이 숨어 나를 때리는 것 같다. 뽑혀 옮겨진 온실 속의 화초가 야생화로 변하여 자라는 그 환경 속에서 스스로 터득해낸 것. 세월이 오래 지난 지금도 비굴하게 살아가려 못하는 강함 때문에 왕따와 손해만 보는 것 같아 외롭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데, 왜 부드럽게 못살아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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