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연정’의 속임수

2005-08-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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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주필)

한국에서는 지난 87년 이후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 국회에서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는 여소야대 현상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작년 4월 총선에서 탄핵정국의 역풍으로 예외적으로 여당이 압승했으나 1년만에 재보선으로 다시 여소야대가 됐다. 한국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다당제가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당도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이다.이런 상황에서 여당은 국회를 마음대로 움직이기 위해 여대야소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데 이를 위해 대통령의 힘이 남용되어 왔다. 의원의 약점을 캐거나 권력을 미끼로 의원 빼어가기, 합당, DJP와 같은 정당연합을 방법으로 썼는데 모두 대통령의 힘을 배경으로 한 인위적인 방법이었다. 지금 노무현 정부의 ‘연정’ 제안도 그와 같은 인위적인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여당의 연정 제안은 원내 4당 중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정권을 다 줄테니 연정을 하여 지역구도를 해소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을 하자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우리당은 누가 보아도 서로 궁합이 맞지 않는 극과 극을 달리는 정당이다. 그런데 야당은 안 하겠다는데도 여당이 정권을 다 주겠다, 같이 하자고 하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연정은 연립내각을 말한다. 의원내각제의 정부 형태에서 원내 제1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 수상으로 선출되어 내각을 조직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정당과 제휴하여 내각을 조직하는 것이 연립내각이다. 연립내각에서는 당의 세력분포에 따라 각료를 배분하고 정책을 공조하기 때문에 이념과 정책이 근접한 정당끼리 협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회당이 민주사회당과 연립내각을 조직하거나 보수당이 극우정당이나 중도정당을 끌어들여 연립내각을 조직한다. 연정에 참여하지는 않는다.이례적으로 연립내각이 거국내각으로 확대되는 경우도 있다. 의원내각제 아래서 전시 등 국가나 체제의 운명이 위협받게 될 경우이다. 이럴 때는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를 넘어 생존 차원에서 모든 정파를 망라한 거국 내각을 만들기도 한다. 영국의 경우 1차대전 중 로이드 조지 내각
과 2차대전 중 처칠 내각이 그런 예이다.

노무현 정부의 연정 제안이 연립내각이나 거국내각을 본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통령중심제인 한국에서는 행정부의 존립이 국회에 의해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꼭 연립내각을 해야 될 상황이 아니며 전쟁 등 국가 존폐의 위기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거국내각을 할 이유가 없다. 한국이 국무총리 제도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대통령이 마음먹기에 따라 국무총리의 목이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정부는 형식이 어떻든 간에 철저한 대통령 중심제이다.

더구나 연정의 목표가 지역구도를 개선하기 위한 선거법 개정이라고 하는데 개정 방향이 복수당선자를 내는 중대선거구제라고 한다. 이런 선거제도는 이미 공화당 때 여당의 절대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써먹었던 제도이다. 그 당시 중선거구제도를 통한 동반당선에서는 여당만 이득을 보았다. 여당은 영남에서 무조건 당선되고 호남에서 차점 당선되었지만 제1야당은 호남에서만 당선되고 영남에서는 무소속에도 차점 당선이 밀려났다. 지금 이런 선거제도를 다시 도입한다면 여당인 우리당이 영남에서는 한나라당과 동반 당선하고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동반 당선하게 된다. 그러니 이런 선거제도는 지역구도를 깨자는 것이 아니라 지역구도를 고차적으로 이용해 선거에서 이기자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연정을 위해 정권을 다 주겠다고 했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토사구팽이란 말처럼 선거법을 고치고 나면 한나라당을 쫓아낼 것은 뻔한 일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마음대로 정권을 다 준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대통령은 권한도 있지만 책임도 있다. 정권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책임을 떠 넘기는 일이며 권한 밖의 일이다. 혹시 그의 말대로 ‘깽판’이 난 정치의 책임을 한나라당에 떠넘기려고 하는 일은 아닌지. 그럴 심산이라면 차라리 대통령직을 야당에 넘겨야 할 것이다.

때마침 불법도청 사건이 터지면서 도청 테이프가 연정을 실현시키기 위한 위협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연정이 되든, 안되든 간에 이 연정은 정략적 속임수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관측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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