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혼은 아름다워라!

2005-08-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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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인생에는 무엇을 꼭 하다가 이 땅을 언제 꼭 만나야 한다는 계약서가 없다. 세상에 와서 무엇을 하든지, 언제 가든지, 그저 왔다가 가면 된다. 그러니 올 때는 신이 났으나 갈 때에는 무엇인가 허전한 것이겠지. 아무런 제약 없이 전세 내고 날개 단 돛은 공짜의 세상인데도 나이 드니 이것 저것 다 빚으로 남고 운신의 몫도 좁아진다. 활동꺼리도 좁아 들고 왕래길도 좁아든다. 이런 이치를 미리 알았다면 한평생 고달프게 서서 오지 않고, 놀기도 하고 앉기도 하면서 살아왔을 텐데...

눈을 붉혀 따져보거나 손가락을 세어가며 계산을 해 보아도 잡정(雜情)만을 인생에다 보태면서 은거초지(隱居草地)를 향하여 걸어 왔다. 그것을 착각하여 나는 서정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고, 비껴가는 잡정을 가엾이 여겨 위로를 해 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계약서가 없으니 갚아야 할 일도 없고 지켜야 할 조항도 없다. 그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남들보다 열심히 산 것처럼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위장을 해 놓고 가면 된다. 그러면 산 자들이 죽은 자를 향하여 훈장을 짤랑짤랑 흔들 듯 혀를 끌끌 찰 것이며, 그것이 우리들의 귀거래(歸去來) 글귀인 지도 모른다.


오는 길이 있으면 가는 길도 있으며, 젊음이 있으면 노쇠도 있다. 산은 산에 그대로 있으되 강물은 흘러흘러 정처가 없고, 하늘은 그대로 있으되 해는 가서 아픈 다리 뻗고 서산에 눕다 간다. 흙은 사람을 따라가지 않지만 사람이 흙을 따라가니, 사람들 발 밑에 짓눌리면 산천이 바람소리를 내며 웃을 수 밖에...

그러나 황혼은 아름답다. 황혼이 지천으로 뿌려대는 아름다운 빛을 우리 말로 노을이라 말 하기에 나는 그 노을을 노을(老乙)이라고 말하여 왔다. 젊음 다음에 오는 천간(千間)의 둘째가 노쇠(老衰)이고 그 노쇠가 땅에 묻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하는 아름다운 광채가 노을(老乙)이라고 나는 늘 생각을 해 왔다. 노을(老乙)의 광채는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지 않는다. 노을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노을은 먼데 선 산사람들에게 황혼의 아름다움을 미리 보여줄 뿐이다.

뉴욕에는 한국에서 오신 노인들이 많다. 오라는데도 없고 갈 데도 없는 노인들이 주인의 눈치를 보아가며 찻집에 앉아, 옛날 이야기에다 답답한 마음을 섞어 담소를 한다. 그 옆에는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구겨진 신문이 하품을 하며 졸리운 눈을 껌뻑거리면서 보거나 말거나 혼
자서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도 나이가 잔뜩 들어서인지 세상살이에 있었던 울분은 다 삭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열심만을 다하며 활동하는 아이들을 보아도 늘어놓을 것 없는 답답한 마음만 조금씩 생겨난다.

후렴을 물려받아 가락을 엮어가는 육자배기를 불러보아도 허전하다. 이벼로가 슬픔, 한과 눈물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육자배기가 마련한 윤창의 흥건한 자리라도 인생을 흉내낼 수 없는 것이겠지. 노을이 지면 세상은 이루어진다. 하늘에 별빛이 가득해도 세상은 어둡다. 그러나 산 자들의 가슴 한 켠에 파여진 웅덩이마다 조금씩 떨구어 놓은 잔노을은 언젠가는 그들이 찾아 불러야 하는 육자배기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윤창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로 왔다가 다시 먼 나라로 가려하는 저녁 노을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나는 무릎을 꿇는다. 하늘에만 노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눈물이 고이고 한숨이 고인 뉴욕의 노인들을 보았을 때 거기에도 노을빛이 깔려 있음을 나는 보았다. 다만 한 덩어리의 노을인 줄 알았던 노을의 색깔이 매일 저녁 각각 다른 것은 노을색을 담은 가슴의 맑고 더러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었다. 왔다가 가는 운명이야 내 맘대로 선택하지 못하지만 노을의 색깔이 어떤 색깔이 되느냐 하는 것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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