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8년만에 다시 가 본 월남

2005-07-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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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남(월남참전 용사)

뜨거운 7월의 열풍이 쏟아지는 한낮, 우리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다낭항에 도착했던 그 옛날의 기억을 하면서 2005년 4월 초 25명의 해병학교 동기생들이 38년만에 격전지 방문을 위해 인천공항에서 에어 베트남 비행기에 올랐다.

월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 또 월남 말, 또 맛있는 식사 등 모두가 새로운 듯 신기하지만 옛날 월남땅에서 겪었던 실제 일들을 회상하며 이야기들을 나눌 때 벌써 6시간이 되어 ‘동양의 파리’라고 불리우는 사이공에 도착했다.전쟁 때는 탄손 누트 공항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물자와 군인들을 날랐던가! 전투지역에서 업무차 왔던 우리 전방 군인들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호이안 옛 주둔 부대를 찾기 위해 비행기로 다낭으로 갔다.
다낭은 항구도시로 미 해병대 총본부가 있었던 곳으로 헬리콥터로 늘 다니던 곳이었다. 이제는 큰 다리가 놓여지고 주택과 산업화로 공장들이 들어서고 큰 빌딩과 상점들, 이제는 호화로운 도시로 변해 있었다.
전쟁의 슬픈 역사가 숨어있는 차이나 비치 바닷가에 우뚝 선 다낭호텔에서 1박 하고 관광버스로 호이안으로 떠났다.

따이한(대한)도로, 전쟁 당시엔 길에 묻어놓은 지뢰와 길가 숲속에서 쏘는 저격수들의 총알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빨리 달렸던 도로였던가. 마불 마운틴 부근에도 온통 주택들이 다 들어서서 옛 헬리콥터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쾅남성의 수도요, 옛 고도였던 호이안의 일부 지역은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입장료를 받는 곳도 있었으며 나의 어린 시절 6.25
때를 생각하며 굶주린 어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늘 갖다 주었던 호이한 국민학교도, 또 사진을 같이 찍던 공자 사당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 월남인의 도움으로 청룡부대 어느 대대의 정문과 같은 곳을 찾을 수가 있었지만 수많은 주택들로 분간할 수가 없었다.1992년 한국과 수교가 이루어진 후 많은 한국의 기업체들이 월남에 진출했는데 그들의 힘을 모
아 호이안 지역에서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충혼탑을 크게 세워주었는데 우리 일행도 전사한 6명의 우리 동기생들의 명복을 빌며 기념 묵상하였다.피와 땀을 같이 흘렸던 전우들, 젊음과 희망을 빼앗아간 원한의 땅을 우리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월남의 자유, 평화를 위해 공산당과 싸우다가 다시는 고국땅을 밟아보지 못한 대한의 아들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1970년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조국 근
대화는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잘 산다고 과거를 잊고 국가 안보에 유해한 일을 하는 사람의 수가 위험수위라고 한다. 6.25전쟁이나 또 우리를 도와준 미국 군인의 고마움을 잊어버릴 때 6.25와 같은 어려움이 또 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월남은 금년이 종전 30주년이라 많은 행사가 있었고 연 7% 이상의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물결로 과거의 적국이었던 미국이 최대의 수출국이 되었다. 또 관광수입이 늘어나 관광객을 환영한다고는 하지만 공산통일이 된 사회주의 국가라 월남 참전 군인들이라고 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몸에 군 뱃지도 못하고 다녔다.

월남지방 군 훈련을 시킨 공로로 월남정부로부터 일등 교육훈장을 받았고 동행한 모두가 훈장 수혜자들이지만 훈장을 수여한 그 당시 정부가 지상에는 없는 것이다.지금 한국참전 군인들이 자랑스럽게 훈장 달고 한국을 방문하는 것이 너무나 부럽게 생각되었다. 미군이 철수한 뒤 1975년 월남이 공산화 되면서 많은 민주 인사들을 죽였고 사유재산이 몰수되었다. 공산 압정을 피해 작은 선박으로 월남을 탈출해서 파도와 굶주림으로 죽고 또 해적들에 피해를 당하고 난민촌에서 고생한 이야기들을 뉴욕에 와서 살고 있는 월남인을 통해 들어볼 때 우리 조국의 공산화 통일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현지 선교사를 통해 14년 전부터 월남에서 병원과 전쟁고아를 위한 복지시설, 또 장학사업을 펼치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 이제는 신학교도 세워 많은 현지 목회자가 나와 여러 곳에 교회도 세우고 계속 부흥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기독교
를 주시하고 있어 기독군인선교회에서는 영어 교사의 이름으로 선교사를 파견한다고 들었다.

월남 파병 군사정보대에서 배웠던 월남어가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 이번 여행이 더욱 보람이 있었다. 기독 군인으로서 미래의 선교지를 가볼 수 있게 해 준 하나님과 특히 주님을 몰랐을 때 전쟁터에 나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안순도 권사(당시 약혼자, 이
옥희 전도사 어머니)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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