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 더위 속에 마시던 술맛은!

2005-07-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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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보스턴)

오래전 본국 정부가 88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외국 관광객들에게 우리나라 고유의 술을 알리려고 했던 일이 떠 오른다. 마시면 취하는 술이 국가의 정책 사업으로 외국인을 위해 홍보까지 해야 했던 일이 떠 올리고 보니 나에게도 술에 얽힌 추억이 하도 많아 어떤 기억으로 부터 더듬어
봐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지금도 가끔씩 가까운 지인들과 어울리거나 한국에서 오는 친구를 맞을 땐 미국인 술집에서 수다스런 백인 아가씨의 술 시중을 들어가며 술 한잔을 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럴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어떤 술을 마실까를 투정해 가며 마시는 술이고 보니 술에서 음미할 수 있는 정취라고는 티끌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 곳에서 마시는 술맛인 것 같다. 흔하디 흔한 양주나 맥주병속에 우리만이 즐기는 술의 정취가 없어서 일까. 어쨌던 우리가 마
시는 술의 정취는 조상대대로 이어저 내려오는 우리네 술이라야만 제 맛이 나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농촌이나 도시에서 즐겨 마시는 술은 막 빚어서 만든 막걸리가 일품이다.지난날 가까이 지냈던 동창간이나 직장에서의 호주가들이 무리지어 즐겨 찾은 곳은 후미진 청진동 대포집 골목이었다. 그곳에서 즐겨 마시던 술은 소주나 막걸리가 전부였다. 그런 군용
드럼통 화덕에 들러 앉아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구워 먹던 그 때 그 맛은 지금도 잊지를 못한다.


어디 그 뿐인가. 휘몰아치는 엄동 설한풍 속에 꺼질 듯 말 듯 희미한 “가바이트” 불빛이 타는 포장마차 안에서 마시던 소주 맛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술맛 이다.가느다란 대꽂이에 얼키설키 꽂아놓은 참새구이에서 부터 구수하게 끓여 우려낸 오뎅 국물이나 먹음직스럽게 잘 진열된 안주 중에서도 감칠맛을 더하는 곱창구이 맛은 한국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맛을 알 턱이 없다.옛부터 우리나라 술은 모두가 토속주로 가정에서 손수 빚어 만들 수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중에서도 손쉽게 빚어 만들 수 있는 막걸리는 밀기울로 만든 누룩에다 쌀을 섞어 따뜻한 온돌방
에 묻어 발효시켜 막빚어 만든 술이 막걸리다.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잊혀져만 가는 많은 기억들! 어쩌다 이렇게 머나 먼 이국땅에 나와 살아가는 나에게도 잊을 수 없는 많은 술 친구들의 얼굴 모습이 그립게 떠 오른다.

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맘땐 맑은 개천에서 낚시로 잡아올린 은어(銀魚)고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안주로 씹으면서 일배일배 부일배의 술 노래와 함께 이미자가 부른 동백 아가씨의 구슬픈 노래를 목청높이 불러대며 한나절의 복더위를 식히던 그 때 그 친구들은 지금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워 진다. 나는 또 다른 추억속의 길을 더듬어 걸어본다. 50년대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소대장으로 초병근무를 했었다. 그 무렵 부대원들과 더불어 한여름 불볕속에 천렵을 즐기던 기억도 잊지를 못한다.

임진강 하구 낮은 물속에 떼지어 몰려 다니는 물고기를 그물로 잡아 취사용 군용 냄비에 얼큰하게 끓여 막걸리잔을 돌려가며 병영생활의 피로를 풀었던 젊은 시절의 군생활도 흘러간 추억으로 떠 오른다.
한 여름 직장에서의 동료들과 즐겨 찾던 청진동 왕대포 집에서 마시던 그 술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서 일까 고희(古稀)의 영욕속에 그려지는 추억의 흔적들이 솔바람에 스쳐 멀리 사라져 간다. 이국의 복
더위 속에 노인(老人)은 지긋이 눈을 감고 깊은 명상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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