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기좋은 세상

2005-07-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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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정<회사원>

런던이 미국과 스페인에 이어 또 테러를 당했다. 9.11사건 이후 ‘지상에 평화’라는 인류 공동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음을 거듭 확인시켜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살기좋은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남긴채 아주 먼 곳으로 영영 떠나 버린 것인가?
나는 십수년 전 근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 했었다.

옛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자연스레 난 그간 살았던 미국 생활 얘기를 했고 친구들은 내가 떠났던 그때보다 한국이 눈부신 발전을 했다는 얘기를 주로했다. 얘기를 다 들은후 나는 “하지만 그때가 사람 살기가 더 좋았는지 지금이 더 좋은 건지는 모르지”라는 말을 좌중에 던졌
다.


예상대로 두패로 갈라졌다. 가치관을 정신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는 친구들은 그 시절이 좋았다고 했고 물질적인것에 더 치중하는 친구들은 지금이 그때보다도 더 좋다고 했다. 현재파는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자가용차, 구하기 힘들었던 전화,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현대식 아파트 등 주로 물질적인 것을 구체적인 예로 들었고 과거파는 가난가난 하지만 그때의 가정주부들은 가계의 지출을 맞추기 위해 밖에 나가서 일하지않아도 되었고 보통 4~5명의 자식을 키울 수 있었고 집안 일도 도우미(식모)까지 고용해 놓고 살 수 있었다고 제법 예리하게 맞받아쳤다.

우리네 선조들은 살기좋은 세상을 한마디로 태평성대(太平盛代)라고 표현했다. 정신적으로 걱정
거리가 없어 태평스럽고 물질적으론 번성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 양쪽면이 모두 만족스러울 때 이상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세상은 물질과 정신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양손에 거머쥘 수 있게 해 줄
때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평화’ 냐 ‘물질적인 풍요’냐의 선택권이 인간들에
게 주어 진 것도 아니다
각 시대마다 한가지 상품만 내어놓고 인간들에게 강매(强賣)해 왔기 때문이다.
물질이 풍요할 땐 정신적인 평화를 주지 않았고 정신적으로 평화로울 땐 물질의 풍요를 주지
않았다.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우리네 조상들은 자기집에서 담궈 놓은 술이 익으면 재 넘어 살고 있는
친구에게 연락할 길이 없어 사람을 보내야 했었다. 요즈음 같이 편리한 전화나 셀폰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시대는 놀랄만한 속도로 진행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생활이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 풍
요해졌지만 한편으로 언제 어디서 또 터질지 모르는 테러의 공포, 날이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
격차, 그래서 더 느끼는 상대적 가난, 사이버 폭력과 같은 새로 생겨나는 정신적 스트레스 등으
로 인해 정신적 평화란 연목구어(緣木求魚)격이 되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달도 꼭 편리함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편함과 스트레스를
동반할 때도 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셀폰소리, 듣고싶지 않은 남의 대화소리 등은 현대인들의 스트레스가 된지 오래다.

또 하나의 예로, 현재 기술적으로는 완벽하게 해결되어 있는 영상까지 전달되는 비디오전화가 각 가정에 설치된 시대를 먼저 가보자.
전화벨이 울리면 소파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던 가정주부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전화기 있는 쪽으로가 아니라 화장실 쪽으로 뛰게 된다.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하고 자신의 웃는 모습도 거울 앞에서 한 번 지어보기 위해서다. 너무 급하게 설치다가 바닥에 놓인 물건을 걸고 넘어지
면 다칠 수도 있다.

전화벨이 스트레스가 될 가능성은 다분하다. 화장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묻는다. “당신 어디나가?” 아내가 대꾸한다. “아니, 어디 전화 한 통화 해야 될 곳이 있어서.” 편리가 아니라 불편해진 것이다.
과학기술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기엔 역부족함을 보여준 것이다. 불안의 근본원인인 종교와 정치 사회 분야가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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