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느림의 미학

2005-07-2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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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중 <시카고>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몰라도 예전에는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우리의 생활습관을 일컫는 코리안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유유자적하며 분, 초를 다투며 살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의 선비다운 멋의 유산일 수도 있다.몇시 몇분보다 그저 한시께, 두시께로 약속을 정하기가 일쑤였고 점심 때, 저녁 때, 더 길어지
면 2~3일 후, 일주일 뒤쯤, 두어달 후로 막연하게 약속 같지 않은 약속을 하며 살기도 하였었다.

이렇게 몸에 배어버린 습관이 바쁜 현대를 살아가면서 점차 바뀌어지고 비가 와도 정식으로 취소를 안한 경우 나타나야 하는 골프게임의 티타임 에티켓 등으로 많이 달라졌다.약속시간에 늦을 때에는 모두들 그럴 듯한 이유가 있겠지만 어느 때나 받아들여지는 변명 중 하나가 ‘교통체증’이다. 출근길에 차안에서 제일 관심 있게 듣는 뉴스는 그 날의 날씨와 교
통정보가 될 것이다.


교통체증의 첫 번째가 되는 원인은 교통사고이거나 도로공사이다. 어느 지점에 얼마나 큰 사고가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체되는지, 어느 곳에 도로공사가 진행중인지 등의 소식은 출근중의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귀중한 관심사요, 정보가 된다. 갑작스러운 폭설 등으로 빙판길이 되어 몇 시간씩 교통체증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날씨에도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새봄에 짝짓기 시즌이 지나고 초여름에 접어들면 알을 까고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일개 분대가 넘는 어린 오리새끼들을 인솔하고 어미 오리가 찻길을 건너는 것을 보곤 한다. 운전자들은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다.운전 중 앞차의 뒤 범퍼에 ‘I BREAK FOR ANIMAL’이라는 범퍼 스티커를 읽으며 미소지은 적이 있다. 갑작스럽게 동물이 나타나면 급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있으니 뒤차는 가까이 따라오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진다.

한번은 좁은 길에서 차량 여러 대가 밀려 작은 교통체증을 일으켰는데 어느 호기심 많고 용기 있는 운전자가 갓길로 운전하여 맨 앞에 가서 살펴보니 길바닥에 널린 도토리들을 다람쥐들이 하나 하나 운반 중이었다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답고 존귀하다.

불타사 현성 주지스님의 올해 첫 법문은 생멸법에 관한 것이었는데 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법칙이 연상되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법문 끝에 스님은 내생에 다시 태어나면 오리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는 오리의 무한한 자유스러움이 부러웠음에 틀림없다. 나도 다음 생에는 한 마리의 새로 태어나도 좋다는 생각이다.자연에 순응하며 과욕을 내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새들을 닮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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