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폐백과 형님

2004-09-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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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가정의,내과전문의,워싱턴DC)

70년대 초반, 샤핑 센터나 길거리에서 한인을 만나면 서로 통성명을 하고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저녁이나 주말에 놀러오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우리도 그렇게 만났다.

형님네와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정선천 장로님이라고 하지않고 처음부터 형님이라고 부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우리가 형님네가 살던 아파트로 이사간 그날 저녁 우리식구 모두 집으로 저녁 초대하여 멀
리 여행에서 돌아온 동생네 대하듯 다정하게 해주었다. 며칠후에는 자기 아파트 키를 엑스트라로 만들어 우리에게 맡겼고 자연히 형님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사촌간이 되었다.


빈털털이로 시작한 미국생활에 박봉인 수련의 레지던트 1년차 월급을 받아서 생활하는데 금방 아이들은 태어나고 집사람은 아이때문에 일을 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 때의 생활은 ‘괴롭다’고 하면 표현이 맞을까? 한국에서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그런 남편을 쳐다보고 지금까지 잠자코 모든 뒷치닥꺼리를 해준 아내가 고맙기 그지없다.

소나 다른 짐승 등도 등이 가려우면 언덕이나 나무둥치라도 있어서 그곳에다 대고 등을 문질러서 가려움을 해소하는데 미국에 친척이라고는 전혀 없을 때 처음 시작한 미국생활에서 형님네는 우리 가족에게 그런 언덕이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형님네는 두 부부가 의자 수리공으로 이민와서 함께 의자 수리샵에 나가서 일을 하는데 두분 다 오버 타임까지 하면서 알뜰히 살았다. 나는 어렵던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미공군에 입대하여 3년을 다른 지역으로 나가서 살다가 워싱턴 D.C.로 다시 오니 재산목록에 아내와 아이들 셋, 자동차 한 대, 현금 6,500달러가 전부였다. 이 많은 식구에 그만큼의 돈을 들고 개업한다는 것은 망망대해를 향해 조각배 한 척에 몸을 싣고 노를 저어나가는 기분이었다.

공군에 있는 동안 형수님은 몹쓸 병에 걸려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있고 형님은 그런 형수님을 살리려고 병원으로 의사 오피스로 동분서주할 때였다. 조카들은 한창 틴에이저가 되어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 상황에 형님과 형수님은 자기집 방 하나를 치워주고 집을 사서 나갈 때까지 다른 곳에 세를 얻어가는 일은 없는 것으로 알라는 것과 성의를 무시하면 그날로 형제의 의는 없는 것으로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마침 난 D.C.내에 연방정부에서 운영하는 큰 병원에 풀타임으로 취직이 되었고 저녁과 주말에 개업해도 좋다는 언약을 받았다. 취직이 되면서 살림집과 오피스를 함께 쓸 수 있는 집을 찾았다. 마침 지금 오피스로 쓰고 있는 집이 매물로 나왔다. 그러나 다운 페이와 크로징 비용해서 약 2만 5천달러가 필요했다.

그때 내 형편으로 그 돈은 갑부들에게나 어울리는 거금이었다. 그런데 그 사정을 안 형님과 죽음을 눈앞에 둔 형수님은 이민생활동안 모은 전재산 일 그 돈을 선뜻 마련해 주셨다.차마 그 돈을 쓸 수 없어 거듭 사양했지만 결국 그 돈으로 그 집을 사고 개업을 하게 되었다.

형수님은 꽃다운 30대 나이에 천사 같은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가시고 몇 년을 홀로 허탈해하며 계시던 형님도 주위의 권유에 못이겨 중매로 재혼을 했다.

마음이 선량하고 남을 잘 배려해주고 정직한 심성을 가진 사람은 내고향 경북 의성에서는 본심(本心)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본심으로 우리를 대해주신 형님은 부인복이 있으신가. 새 형수님은 마음씨도 좋고 활동력도 있고 자상하시다.

수십년간 두 집안이 땡스 기빙, 크리스마스, 신년에는 반드시 함께 모여 보낸다. 지난 7월초 우리 큰 녀석이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결혼을 했는데 형님은 며느리로부터 폐백을 받았다. 형님과 형수님이 절을 받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보는 내마음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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