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장(化粧)의 변화는 서글프지만

2004-09-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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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변한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여자 십대에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예쁜데 화장을 하고 싶어 아무도 보지 않는다 싶으면 화장품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그러다가 이십대가 되면 신나게 화장을 한다. 다 핀 화색에 화장까지 곁들이니 그 아름다움은 과히 비할 데가 없다. 그러니 결혼하는 남자들은 신부 앞에서 황송하기 그지 없었겠지.

아이도 낳고, 살림살이에도 조금은 시달리는 삼십대란 물에 얼굴을 씻고 거울 앞에 앉으면 조바심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얼굴에도 정장을 한다. 어쩔 수 없다. 세월인 것을! 사람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사는 재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한 사십대에 들어서면 꿈 꾸면서 시행하던 화장은 그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리움 가운데로 사라지고 화장이 가장으
로 변한다. 따지고 보면 거기에는 인생의 가치관과 생활의 허영관이 눈물겹게 함께 버무려져 있는 것이다.


누군들 인간의 아름다운 본질과 생활의 사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었던가! 있거나 말거나, 되거나 말거나 나이 사십이면 얼굴에도, 생활에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나이이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보기에 좋은 모양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생 사십에 넘나드는 공허한 방황이 가장으로서라도 감춰지기를 바란다.

인생 사십대에 오라는데도 별로 없는데 거울 앞에 우울하게 앉아 자꾸만 얼굴을 들여다 본다. 가는 세월 붙잡아 무릎 꿇리고 야단이라도 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이 오십이 되면 가장도 통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화장이 환장으로 확 변한다. 갱년기도 오고 신경질도 나고 짜증도 나고, 그 뿐이 아니지, 그래도 오랫동안 한 솥밥 끓여 먹으면서 서로 서로 걱정을 해주고, 맞벌이 일거리에 아프다는 다리도 주물러 주고, 감기 몸살에 약방도 왕복 전차처럼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온 남편마저
웬지 못마땅하고 미워지는 여자 나이 오십대, 화장이 환장이 되는 나이가 된다.

가장 겁나는 시기다. 얼굴이 갑자기 뜨겁게 화끈거리다가 답답해 지고 살기 조차 싫어지는 나이, 나는 그런 내 여자 앞에서 해보지도 않았던 산토끼 춤도 위안거리로 추어 보았고, 웃거나 말거나 우스개 소리도 잠이 솔솔 들어가면서도 중얼거려 보았다. 아무 짝에 쓸데가 없었다. 다만, 세월이 늘어놓은 육신의 자연법칙이란 걸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그러기를 몇 년, 여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힘이 드는 오십대를 벗어나 나이 육십에 들어서면 얼굴에 변장을 한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서글퍼진다. 하기야 화장의 원리가 아름답고자 하는 욕망의 변장이니 나무랄 것은 못 된다. 그게 알고 보면 발전인데 나이 육십줄에 들어서면 아무리 변장을 해도 얼굴에는 들랑달랑하는 표정이 없어진다. 덜커덩거리며 시내를 달리던 버스가 종점 차고에 들어가 엔진을 끄고 조용히 식어가는 모습이다.

얼마나 바쁘게 살아왔는가. 우리 모두는… 우리들에게 과연 목적이 있었고, 목적지가 있었을까?

집 근처 등대가 보이는 바닷가에 해 저물어 나가 본다. 아! 그렇지! 등대불은 목적지가 없어도 흥분을 뿌리며 맨발로 뛴다. 칠흑같은 어두움을 무겁게 짊어지고서도 신혼의 신부같이 화사한 얼굴로 밤에 뛴다. 뛰다가 끝없이 뻗어있는 어느 먼 지점에서 더 이상 뛸 힘이 없으면 아무도 모르게 목숨을 놓고 사라지지만 가난했을 때 먹어본 까끄라기 밥 한 술을 향수로 생각하면 그간의 여정을 힘들다 하지 않는다.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이 있어서 기쁘게 사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꾸밀 수가 있어서 희망스러운 것이 인생인 것이다. 여자의 일생에서 몇 번 변하는 화장, 결국은 육자배기가 되는 흥건한 자리이겠지만 아름다워지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으니 서러워도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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