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위대한 패배

2004-09-02 (목)
크게 작게
이기영(주필)

지난 29일 폐막된 아테네올림픽의 마지막 날에 벌어진 마라톤경기에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출발점으로부터 37km 지점에서 선두를 달리던 브라질의 반데를레이 리마 선수 앞에 한 남자가 뛰어들었다. 그는 리마선수를 관중 앞으로 떠밀고 가서 쓰러뜨렸다.

약 10초간의 해프닝이 있은 뒤 리마선수는 다시 뛰기 시작했으나 이 사건으로 페이스를 잃은 리마선수는 1km를 더 달리다가 선두를 이태리 선수에게 빼앗겼고 이어 미국선수에게도 추월당했다. 그래서 그는 동메달을 따는데 그쳤다.


리마선수는 출발 이후 15km 지점에서부터 줄곧 선두를 지켜오고 있었다. 2위 그룹과는 300여 m의 거리를 유지했고 40초 가량 앞선 단독 선두였다. 이 사건이 없었다고 해서 그가 계속해서 선두를 유지하여 마라톤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금메달은 그의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리마선수의 진로를 방해한 남자는 아일랜드의 종말론 신자인데 종말이 오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이 광신자의 미치광이짓 때문에 리마선수는 금메달을 눈 앞에 두고 놓친 셈이다.

올림픽 경기종목 가운데서도 마라톤은 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리마선수의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브라질 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리마선수에게 금메달을 공동 수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작 금메달을 잃어버린 리마선수의 태도는 너무도 의연했다. 그는 올림픽 폐막식이 끝난 후 기자회견에서 “사고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우승했다고는 할 수 없다”면서 이번 일에 대해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올림픽은 훌륭하게 치러졌다. 이런 일은 어디서나 생길 수 있다. 다만 나같은 일을 또 당하는 선수가 생기지 않도록 어떤 조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인가. 자신이 불이익을 당한 경기이지만 그 경기를 훼손시키지 않았고 자기 자신은 희생되었지만 앞으로 다른 사람은 희생되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승리에 대한 욕심을 깨끗이 버림으로써 스포츠정신과 올림픽정신을 지켜주었다. 심판들의 오심으로 받은 금메달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폴 햄 선수와는 너무도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지난번 미국 대선에서 부시 후보가 고어 후보에게 박빙의 차이로 승리했을 때도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았다. 민주당의 고어 후보는 전국 득표수에서 부시 후보 보다 많았고 승부가 판가름 난 플로리다주에서 재검표를 완전히 실시했을 경우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화당 편인 대법
원이 부시쪽의 주장을 들어줌으로써 그는 대통령의 꿈을 접었다. 이로 인해 고어는 대통령 자리는 잃었지만 미국의 헌법과 법치주의는 지켜주었다.

이와 반대로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판을 깨는 일을 자주 볼 수 있다. 정권을 잡기 위해 법을 뜯어 고치기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법을 어기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판을 깨게 되면 결국 그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와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지금 한국에서 개혁이니 과거사 정리니 하는 문제들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 속셈을 가지고 그 목적을 위해 판을 깨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정치권력이 개혁과 과거사의 잣대를 마음대로 만든다면 미래의 정치권력이 또 다른 잣대를 만들어 재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내 탓’이라고 하지 않고 ‘네 탓’으로 돌리는 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설혹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이 남의 탓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피하지 못한 것은 내 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흉악범들 조차 자기의 범행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판이다. 권력이나 돈을 가진 사람들은 법이나 사회정의, 공
공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과 돈의 힘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법과 사회 정의, 공공이익을 파괴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눈 앞에 있는 올림픽 금메달을 억울하게 잃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진정한 올림픽정신을 보여준 리마선수의 자세는 정말 금메달감이다. 그의 패배는 위대한 패배로 남을 것이다. 그가 오는 2008년 북경올림픽의 마라톤에서 다시 뛰어 통쾌하게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보고 싶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