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과거를 묻지 마세요

2004-08-3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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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우리는 눈만 뜨면 국내외 뉴스를 골치 아플 정도로 많이 보고 듣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사는 동안, 무덤으로 가기 전까지는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항상 괴로움과 슬픔에 관한 소식들을 신문이나 TV에서 접하며 살수밖에 없다. 이 것이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를 통해 사람들 가운데 꿈과 희망을 잃고 좌절감과 무력감으로 현실을 부정하며 포기하려고 드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그것은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한국의 상황을 보더라도 요즘 정치권은 여야 쌍방간에 서로 친북이네, 친일이네 하면서 치고, 박고, 긁고, 할퀴고 야단이다. 이유는 서로의 과거를 묻지 말아야 되는데 자꾸 끄집어내면서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란 노래와 달리 계속 지난날의 과오를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방에 생채기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용서(forgive)란 말은 많이 쓰면서 잊는 것(forget)은 안 하려 드는 것이다. 누구든지 뒤를 돌아보면서 그걸 자꾸 되씹으면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문제가 시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한인들도 보면 종교 믿는다, 뭐다 하면서 남의 약점만 캐내 곤궁에 빠뜨리려는 습성이 없지 않다.

물론 인간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필요한 순간이 오게 되면 또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이런 뜻이 있는데...’ ‘나를 몰라주고...’ 하면서 나만 정당화시키려는 본성을 갖고 있다.

허지만 이는 모두 뒤를 돌아봄으로 인해 생겨나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가만히 묻어두면 될 일을 긁어 부스럼이 되게 한다. 소는 풀을 먹을 때 일단 삼킨 풀을 위에 일단 저장해놓고 다시 끄집어내 야금야금 씹으면서 되새김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소가 아니라 인간이다. 그런데 소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며 남의 잘못이나 약점을 끄집어내면 인간이 소와 다
를 게 무엇인가.

결국 인간이 소처럼 하다보면 누군가 상처를 입게 되고, 또 상처를 입은 쪽은 다시 상대방에 상처를 입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된다. 결국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되어 서로에게 나쁜 결과만 돌아오게 되어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남을 해치면 결과적으로 자신도 해를 당한다고 칼을 쓴 자는 칼로 망하고 총을 쓴 자는 반드시 총으로 망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도 남을 비판하면 결국 내가 비판을 받게 되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기록돼 있다.

다 아는 얘기지만 예수에게 ‘간음한 자를 처벌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자 예수가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고 한 말은 남의 약점이나 잘못을 들춰 상처를 내지 못해 안달하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국의 한 판사가 샤일록에게 내린 명 판결도 같은 맥락에서 주목해야 될 사건이다. 한 채권자가 빚을 받기 위
해 채무자를 고소한 재판에서 이 판사는 ‘채권자가 원한다면 빚진 자의 몸에서 살을 2파운드 떼 가도록 해주겠다. 단 피를 흘리지 않고 떼 가라’고 명하였다. 결국 이 재판은 빚쟁이가 그렇게 하지 못해 채무자의 빚이 탕감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 판사의 판결 속에는 상대방의 과오를 용서해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샤일록에 대한 판결은 자신은 허물이 없는 양 남을 정죄하려 드는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고 있다. 인간은 한마디로 누구를 단죄할 만한 자격이나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남의 과거를 들추지도 말고 남의 약점이나 잘못을 건드려 상처도 내지 말자. 돌아보게 되면 결국 기쁨이나 즐거움보다 고생되고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억울한 일이 사람마다 더 많다. 이것이 인간사일진데 그걸 돌아보고 억울하다, 나
쁘다, 잘못됐다 하는 것은 좀 웃기는 이야기다.

역사란 그 때 그 때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물론 당대에 잘못된 것은 훗날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것은 건드리면 너도나도 상처만 날 뿐이다. 그렇다면 지난 날을 거울 삼아 교훈으로 삼는 것이 이 시대 우리들의 할 일이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부모나 조상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고 허물을 덮는 마음으로 살면 내 마음도
편하고 주위도 편하고 이 사회도, 국가도 더불어 평화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희망은 바로 이런 속에서 싹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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