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국민이 되려면

2004-08-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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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예비역 준장)

조지아주에 있는 스톤마운틴(Stone Mountain) 관광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곳에는 거대한 바위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을 위해 정상까지 케이블카가 운용되고 있다. 이게 고장을 일으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계적 고장이 아니라 정전이 된 것이다. 비상용 배터리로도 운행이 안 되는 듯, 무려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날 관광객의 한 사람이었던 하국인 장 선생은 미국같은 막강한 나라에서 이게 뭔가 싶어 몹시 짜증이 나고 울화통이 터졌다. 말만 통하면 한 차례 호통이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었던 약 500명의 관광객 가운데 큰 소릴 치거나 불평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친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다음에 일어난 장면이다.

4시간쯤 지난 후 케이블카가 가동되어 다시 승차를 하게 됐다. 여기 저기 흩어졌던 500명의 사람들이 다시 줄을 서는데 이전에 섰던 자기 위치에 어김없이 서더라는 것이 아닌가. 잽싸게 달려가 앞줄에 붙어보려 했던 시도가 금새 부끄러움으로 다가온 순간이다.

외국 식당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거나 떠들면 당장 어른들이 꾸짖고 단속하는 장면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식당, 지하철 어디서나 아이들이 소리치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귀여워 죽겠다는 식으로 내버려 둔다.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해가 된다는 것 쯤은 알만큼 고등교육을 받았을 곁에 있는 젊은 엄마를 볼 때면 아직 멀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미국에 이민을 간 한국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유치원엘 갔다. 큰 기대와는 달리 유치원 선생은 엉터리였다. 적어도 이 엄마의 기준으로서는 말이다. 영어 단어 한 마디, 아라비아 숫자 개념 하나라도 아이들 머리에 넣어줘야 돈 드린 보람이 있을텐데 전혀 그게 아니올시다이다. 그저 모여서 차례대로 줄 서기를 하고, 장난감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상대방을 돕고 협동(팀웍)하는 놀이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너무 실망해서 아이를 보내지 않으려고까지 했다고 한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들의 생활문화에 배어있는 질서와 도덕률의 배경을 발견하고 문명인의 저력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유치원의 쓸모없는(?) 교육을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1세기에도 최고의 가치로 남아있을 자유와 민주주의는 남이 언뜻 선물로 가져다 줘서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국민소득 1만달러에서 8년 동안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한다.

하지만 정말로 선진국 되기를 원한다면 그보다 먼저 선진국 사람 다운 삶의 방식을 갖추는데 정성을 모을 일이다. 강남의 졸부들이 외국 나들이 하면서 연출했던 어글리 코리언의 창피한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선진국과 문명인은 GDP 숫자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사회가 문명화 될수록, 다원화 된 사회 구조가 하나의 세계로 길을 열어갈수록 희생, 봉사, 양보는 더욱 존귀한 화두로 우리 생활의 한 가운데 자리할 것이다. 희생은 봉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봉사하는 마음은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 우러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뼈가 부드럽고 두개골이 야들야들할 때 자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세 살 적 버릇
은 여든까지 가니까.

이기적 본능을 채우는데 술책을 부릴 줄 아는 영특함이 몸에 배이기 시작하면 이미 때는 늦다. 사람을 만드는 것은 교육이고, 특히 인성교육은 어렸을 때 해야 하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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