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해외입양인은 관직 없는 외교관이다

2004-08-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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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영(보스턴)

“그 때는 몰랐어요. 왜 어머니는 없어지고 나만 길거리에 남았는지. 어머니, 자식을 버렸다고 부끄러워 하지 마세요!”“여섯 살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비행기에 올랐던 순이는 이제 두 딸을 둔 어머니가 되어 마음속에 심은 미움의 억센 풀은 모두 뽑아버리고 희망의 꽃만 활짝 피게 심어놓고 있답니다. 어머니가 그리워 사무쳐 울었던 순이가 27년만에 사회복지사가 되어 태어난 조국땅에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꼭”한인 입양아들의 친목단체인 ‘다 함께’가 추진하고, 본국의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하는 세계한인 입양인대회가 지난 8월 3일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미국을 비롯 독일, 스웨덴 등 세계 25개국에서 430여명의 한인 입양인들이 모여 서로간에 친목과 입양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이 대회는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최되었으며, 2001년엔 노르웨이에서, 이번 대회는 세번째로 모국인 서울에서 개최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번 대회가 모국인 한국에서 열린다는데도 큰 뜻이 있지만 함께 참석한 입양 부모의 관심과 세계 중요 언론의 취재 열기도 대단했다. 이들 중요 언론의 관심은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50년이 지났고 한국의 산업이 선진화 된 지금에도 해외 입양이 계속되는 이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특히 한인 입양인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흘리는 눈물을 보고 그들
이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다고 쓴 신문기사를 읽었다.

한국인의 해외 입양이 본격화 된 시점은 6.25를 겪은 1954년이다. 15만명이 넘는 전쟁 고아와 혼혈아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 입양을 허용하는 대통령 령을 공포하게 되었다. 한국정부의 해외입양 허용과 함께 처음으로 입양을 주선한 사람은 미국인 ‘해리 홀트’씨였다.

해리 홀트씨는 1955년에 홀트 아동복지회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8명의 전쟁 고아를 미국에 입양시키면서 지금까지 10만명이 넘는 고아가 미국에 입양되었다.이와 함께 한국인의 해외 입양은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벨기에, 호주 등 그밖에 여러 나라로 확대되면서 한국인의 해외 입양은 무려 15만여명에 이르고 있다.

해외 입양이 계속 늘어나자 한국정부는 1961년에 입양 절차를 규정하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쟁 고아보다는 가난이나 미혼으로 버려진 고아를 입양시켰다.그 후 70년대와 80년대 들어 한국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자 국제사회서 바라보는 시각도 곱지만은 않았다. 심지어는 북한까지 나서 해외 입양을 인간 수출품이라고 비난했던 일을 기억한다.

그런 비난 속에서도 본국사회는 지금도 가난과 미혼모들의 출산 증가로 해마다 버려지는 고아가 늘어나자 해외 입양보다는 국내 입양을 장려하기 위해 특혜까지 주는 방안을 세웠지만 혈통을 중요시하는 전통 때문에 국내 입양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번 해외 입양인들의 서울대회를 보면서 성장 배경이 달라 정체성 유지에 다소의 문제점도 있을 줄 안다.그렇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와 한 핏줄을 나눈 자녀이며 형제다. 결코 그들이 원해 조국을 떠났던 입양인들은 아니다.

한국인의 혈통으로 그리워하던 조국을 찾아온 그들에게 본국 정부와 국민은 입양이란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동포애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 한다.

이제 그들은 성장한 한국계 외국인으로 주목받는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는 관직 없는 외교관이다.본국민은 물론 해외 한인사회도 편견 없는 마음으로 그들을 품어 만들 수 있는 우리 ‘다
함께’를 외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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