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아버지가 배운 섬머캠프의 교훈

2004-08-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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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법정통역관)

여름방학이 되면 이곳에 살다 직장 때문에 한국으로 가서 사는 손자가 이곳 여름 캠프에 온다. 작년에 나이 9살밖에 안 되는 아이를 처음으로 보스턴 근교에 있는 캠프에 데려다 두고
올 적에 우리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거의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지만 캠프가 끝나 데리러 갔을 적에 이 녀석은 신바람 난 캠프생활을 보냈는지 우리의 걱정이 전혀 기우였음을 보여
주었다.

캠프 생활의 적응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모양이었고 우리는 아이의 성숙함에 오히려 깜짝 놀랐다.올해엔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에미는 아이를 데려다 놓고 한국으로 가버렸고 캠프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일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몫이 되었다. 이 해의 캠프는 일종의 영재학교 프로그램이었다. 손주 아이가 학교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나마 등록이 가능했다는 특수학교라 했다.


캠프의 2주째 주말에는 부모들이 방문하는 날로 정해져 있었다. 2주가 가까워지자 한국에 있는 아이의 에미가 성화여서 부모 방문날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신 방문하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할아버지 할머니가 찾아왔으니 아이는 그야말로 날듯이 신바람이 났다. 학교의 허락을 얻어 아이를 데리고 이웃하는 타운으로 가서 색다른 박물관 구경이며 샤핑도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영화관에도 가며 즐거운 하루 나들이를 했다.

아이가 돌아오는 차 속에서 자기는 일주일 남겨둔 캠프를 취소하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법적 보호자가 아닌 할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을만큼 아이는 성숙해 있었다.오는 금요일이 마지막 날이니까 나흘 밤만 지나면 되는 것이니 참고 끝내고 오라고 달래었다.학교가 가까워오자 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확인해 두었다. 할아버지로서는 캠프를 취소하고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고 말해 주었고, 아이도 알아듣는다고 했다.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가 이제는 울면서 자기 넋두리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원하지도 않던 이런 캠프를 엄마가 일방적으로 등록을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오긴 왔지만 “죽고 싶을 정도로” 이 캠프가 싫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아동심리학자나 정신과 전문의가 들었다면 필경 심각한 일로 대처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몸부림쳐 울고 있는 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교무처에 가서 이런 사유를 설명하고 조기 퇴교 절차를 밟았다. 한국의 에미에게 전화를 했고 즉석에서 이를 허락한다는 동의서를 팩스로 보내와서야 절차는 끝났다.이래서 이 섬머스쿨은 일주일을 조기 퇴교했다. 이날 저녁에는 한국에 있는 에미와 전화로 심한 언쟁이 시작되었다.

에미의 주장은 내가 학교에서 전화를 했을 적에 아이를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었는데도 내가 너무 강경해 어쩔 수 없이 조기 퇴교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시비의 초점은 아이가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의 주장은 심지어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해야 옳은 심각한 사안이라고 펄펄 뛰는 반면에 에미는 요사이 아이들이 쓰는 말투로 이런 정도는 전혀 예사로운 일상의 말버릇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며 이보다 더한 무자비한 용어를 일상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이들의 이런 말버릇을 몰라 과잉 반응을 보인 꼴이 되었다.

세상이 점점 타락해 가는 요사이 아이들의 말투를 제대로 알아듣기가 쉬운 일이 아닌 걸 알았다. 할아버지가 배운 한 가지 문화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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