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드라마 폐인

2004-08-0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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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작년 말 조선시대 여 수사관을 주인공으로 한국 TV드라마 ‘다모’를 좋아하는 마니아 군단이 형성되며‘다모 폐인’이란 말이 생겨났다. 원래 병, 마약 등으로 몸을 망친 사람을 칭했던 폐인(廢人)을 신세대들은 인터넷이나 게임에 중독돼 사회생활에 지장 받는 사람을 ‘인터넷 폐인’이란 새로운 의미로 둔갑시켰다. 다시 이 단어는‘드라마 폐인’이란 신조어를 출사시켰다.

과거에는 아무리 드라마 인기가 높았어도 종영 후에는 열기가 사그라지면서 등장인물이나 내용이 잊혀지기 마련이었는데 요즘은 인터넷 동호회가 생기면서 팬까페, 패러디 신문, 온라인 시청자 게시판 등을 통해 종영 후에도 관심과 사랑을 받고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 폐인 증상이 미주 한인사회에도 등장, 우리의 실생활까지 지배하고 있다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닌가. 현재 인기 최고인‘파리의 연인’비디오 테이프가 나오는 월요일 저녁이면 한인밀집 지역의 비디오점마다 한인들로 줄을 선다. 집에 가는 길목에 있는 플러싱의 한 대형 비디오점 도로에는 이중 삼중 사중으로 차가 불법주차 하고 소화전 앞에도 막무가내로 주차하는 등 교통이 꽉 막힌다.

뉴저지의 한 비디오 주인은 도저히 더 이상은 테이프를 복사할 수 없다고 내일 오라고 하면 밤늦게라도 무조건 기다리겠다는 드라마 마니아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 새벽까지 비디오를 보면 다음날 근무시간에 졸게 마련이다. 도저히 뒷편이 궁금해 테이프 나오기를 못기다리는 사람은 방송사 홈페이지를 통해 앞질러 보기도 한다.

한번 빌린 테이프를 보고 또 보고, 출근길 운전하다가도 드라마 장면을 생각하고 히스패닉이나 흑인고객이 산 물건 가격을 찍다가도 드라마의 멋진 대사를 생각하고 그러다가 실수라도 하면 그 얼마나 낭패이며 자신의 그 모습이 얼마나 한심할까. 평일에 바쁘니까 당장 보고싶은 드라마를 꾹 꾹 참고 주말에 몰아서 보다가 다음날 교회 예배시간에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꾸벅 꾸벅 조는 사람도 있으니 그야말로 참으로 미국에 왜 살지? 하는 말이 안나올 수 없다.

어떤 이는 친지나 친구들 모임에서도 한국 드라마 얘기가 나오니 혼자 소외감을 느껴 휴가기간동안 1편부터 마지막회까지 시리즈물을 몽땅 빌려보다가 그만 그 잔재미에 빠지고 말아 일주일동안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밤낮으로 보느라 황금 휴가를 몽땅 갖다바쳤다고도 한다.

많은 한인들은 한국에서 인기있다는 드라마에 왜그리 쉽게 빠질까?
첫째 세상이 재미없나 보다. 미국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벌어도 빈 독에 물 붓기니 렌트나 자동차값, 각종 나갈 돈 등에서 해방되어 잠시나마 생활의 고달픔을 잊고싶은 가보다. 한국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모두 어렵고 답답하다보니 한국인들이 그 돌파구로 신데렐라와 왕자 이야기로 도망쳐 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둘째 단순한 게 좋은 가보다. 미국에서의 신분이고 사업문제고 복잡하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니 일시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로토 당첨을 기다리며 열심히 복권을 사는 것처럼 신데렐라 스토리를 통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황당무계한 만화같은 스토리에 울고 웃다보면 자신의 삶도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되는 것이다.

세째 너무 외로운가 보다. 영어와 달리 별 신경 안쓰고 꾸벅 꾸벅 졸면서도 귀에 쏙 들어오는 우리말 대사로 된 드라마는 자신이 살던 고향 모습도 보여주고 추억도 되살려주면서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니 이민 스트레스도 확 풀어지는 것이다.

“한국 TV드라마 보는 재미도 없으면 나 미국 못살아”하지 말고 보긴 보되 너무 빠지지는 말자. 드라마 폐인의 정도가 심할수록 잊고싶은 일들이 많은 가 보다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생활 패턴이 흔들려서는 안되겠다.집 걱정, 아이 걱정, 일 걱정 다 잊어버리는 그 시간은 행복하겠지만 너무 한곳에 치중하다보면 자신이 꼭 해야할 일을 건성으로 하게되고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소홀하게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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