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당신은 누구인가?

2004-07-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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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이라면 코드 넘버 007의 제임스 본드일 것이다. 영국 작가 이안 플레밍의 첫소설 <카지노 로얄>에 제임스 본드란 인물이 탄생된 후 영화로 만들어진 007 첩보영화 시리즈는 40년 이상 새작품이 나올 때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숀 코넬리,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 잘 생기고 용감무쌍한 남자배우들이 특수무기를 지닌 첩보원 제임스 본드역을 맡아 악의 조직과 싸우는 모험담을 보여주는데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기관은 비밀정보국으로 첩보 수집이 주요임무다. 바로 이 정보를 수집하는 자가 스파이, 바로 간첩이다.


여자 스파이로는 마타하리(Mata hari)가 있다. 본명은 마르가레타 게르트루이와 젤레이지만 인도네시아어로 ‘태양’또는 ‘서광’을 뜻하는 마타하리는 인도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마타하리는 무대 데뷔 이후의 예명이었다.

세계 제1차 대전 직전 타고난 미모와 누드에 가까운 무용으로 이름을 날리며 파리 상류사회를 자유롭게 출입하던 마타하리는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측에 포섭되어 스파이로 활동했다. 1917년 초 프랑스 당국에 체포, 자신은 독일인으로부터 돈을 받긴 했으나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그해 10월 총살되었다.

커티스 해링턴 감독의 영화 <마타하리>는 한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배우 실비아 크리스텔을 등장시켜 연합국 군부의 고위층을 유혹하는 에로틱한 미녀 첩보원으로 그녀를 그렸다. 얼마 전 영국 정보기관은 ‘마타하리는 독일 스파이가 아니다’고 발표한 일도 있다.

그런데 이처럼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은 영화나 전설 속에 나오는 스파이는 돈도 펑펑 쓰고 젊고 멋지며 섹시한 매력도 듬뿍 풍긴다. 또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속된 정보기관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 눈앞의 현실은 남루하기 짝이 없다.

미국 정부에 ‘기밀 수집’이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7년 반만인 지난 27일, 실형을 거쳐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족쇄를 푼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 한국명 김채권은 누구일까?

1940년 한국에서 태어나 1970년 31세 나이로 NASA에 입사, 4년후 시민권을 받았고 1978년부터 미해군 정보국 컴퓨터 전문가로 근무했던 그는 단돈 50달러로 미국에 와 성공한 이민 1세였다.12년간 군사기밀을 다루는 유능한 정보 분석관으로 미국에서 자리잡고 노후가 보장된 그는 왜 수십년을 살아온 미국에서 죄수라는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가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해군 무관에게 넘겨준 정보는 북한주민과 북한군의 동요여부, 국제사회가 보내준 식량이 북한군에 유입되었는 지 여부, 북한주민 탈출실태 등으로 제 1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넸다고 한다.


동맹국과 공유할 수 있는 정보에 어두운 한국을 위해 일했다는 그를 한국 정부는 어찌 대했는가.‘미 사법당국에 넘어간 이상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대를 이어 무응답으로 대하고 있다. 미주 동포들도 그랬다.

‘미국 시민권 받을 때 미국을 위해 살겠다고 선서한 것인데, 벌이 과중하긴 해도 혹시 한미간 갈등에 불씨가 되면 어쩌나?’하며 그를 애써 잊고자 했다.그는 미국시민으로서 책임을 버리고 자기를 낳아준 한국에 대한 짝사랑을 택한 탓에 안정된 직장, 재산, 안락한 노후를 모두 잃었다. 1997년 7월 간첩음모죄로 9년형 징역을 선고받고 펜실베니아 알렌우드 연방교도소에 복무하다가 최근 3년의 보호관찰을 남긴 전과자가 된 채
홀로 서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그의 처지를 보면 참으로 서글프다.좀더 잘 살아보겠다고 정든 땅 고국 산하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 온갖 고생 끝에 자리잡고
어렵게 시민권을 받은 당신, 당신은 누구인가? 한국사람인가? 미국사람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기로에 설 때 머리는 미국을 택해도 심장은 한국쪽으로 벌떡이고 있지 않을 자신 있는가?

빈털털이인데다 머리까지 하얗게 센 이 시대 마지막 스파이 로버트 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다는데, 그 마지막 소원이 이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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